▲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TCO㈜더콘텐츠온
02.
"좋은 기억이 가득해."
영화의 시작과 함께 루돌프의 가족이 강가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남자들은 물속으로 뛰어들고, 어린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산과일을 따 모은다. 강물 위의 윤슬마저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들 모두에게 삶은 매일이 축복과도 같다. 생일이면 근사한 선물을 주고받고, 이탈리아의 온천을 추억하며 행복하게 웃고,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면 동화책도 읽어준다. 집안일은 가정부들의 몫이며, 넓은 마당의 정원을 꾸미는 일만이 행복인 낙원과도 같다. 그렇게 단란한 날들이 이어진다. 단 하나, 루돌프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지휘관이며 그들의 집이 수용소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고.
이 작품은 수용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처음부터 루돌프의 가족에게만 관심이 있다. 그동안의 홀로코스트 작품과는 다른 선택이다.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 사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거나 회피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높은 담벼락 너머에는 굴뚝을 타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연기가 있고,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 분)에게는 모피와 장신구 따위의 세상을 떠난 유대인들의 증거가 전해진다. 가족의 아이들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치아가 담긴 상자를 가지고 놀고, 집 근처 강바닥에서는 유골이 발끝에 닿는다.
감독은 이미 처음부터 이제 등장할 이 '평범한' 이야기가 결코 일반적인 종류의 것이 아님을 경고한 바 있다. 2분가량 지속되는 어둠과 그 너머의 기괴한 소리를 통해서다. 여기에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며, 그것을 가리고자 한들 비켜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강한 메시지가 놓인다. 아우슈비츠의 높은 담벼락의 의미를 생각하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더욱 명확해진다. 각지에서 끌려온 유대인들은 저항에 대한 육체적, 심리적 결의와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경계는 오히려 나치 측이 가진 의지의 발현에 가깝다. 불능(不能)이 아니라 위장(僞裝)을 위한 것. 영화가 바라보고 있는 지역의 삶도 별로 다르지 않다.
03.
아이러니하게도 감춰져야 했을 이들의 삶은 갈수록 더욱 선명하고 뜨겁게 피어오른다. 수천, 수만 장의 프레임이 더해지는 과정에서 이들 가족의 화원은 화려해져만 가고, 아이들은 그들이 배워야 할 감정의 씨앗을 싹 틔우며 자란다. 루돌프와 헤트비히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평생 꿈꿔왔던 모습이자 히틀러 총통이 말했던 모범적인 삶의 모습인 셈이다. 여기에는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다. 생의 자랑이자 긍지와도 같다. 방 한편에 모여 유대인을 더 효율적으로 살해하는 방식과 소각장의 시설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가동될 수 있을 방법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토의하는 이들의 모습마저 자연스러울 정도다. 이 기술의 성공이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줄 것이라 믿는 지휘관의 욕망이 이 악의로 가득 찬 공간과 동일한 방향으로 공명하고 있는 탓이다.
카메라는 여전히 담 너머의 잔혹한 현실과 그 장면을 보여주길 거부하지만,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존재하는 두 공간 사이의 대비는 자연스럽게 기립한다. 장벽 내부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어떤 미동도 하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과 그 너머의 모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생의 가느다란 실마리를 어떻게든 잡아보고자 했을 이들의 절규 사이로부터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관객의 마음속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의 일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레이저 감독은 이를 교묘하게 활용해 낸다. 양쪽 모두를 보여주는 일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의 균형이 여기에서 일어난다. 어떤 증거는 크기와 무관하게 자신이 간직한 사실을 선명하게 그려내곤 한다. 그리고 이 균형은 과연 어느 쪽이 밀폐되어 있는 공간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선명한 현실을 부정하고 유리(遊離)하면서까지 웃고자 하는 쪽인가, 사라져 가는 동안에도 주어진 생을 수용하며 울음을 토하는 쪽인가.
이후 등장하는 루돌프의 전출과 이사 문제에 대한 가족의 태도는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