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 드라마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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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으로 영조 1년 9월 24일자(양력 1725.10.29) <승정원일기>에 수록된 이 상소문은 식량 대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과도한 음주 문화를 언급했다. 이태배는 곡식이 막걸리 빚는 용도로 허비되고 있다며, 대중이 술을 많이 먹는 원인으로 주점의 번창을 지목했다. 그는 "자고 이래로 술을 지나치게 빚는 일이 지금처럼 고질적 폐단이 된 적은 없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수십 년 전을 보면, 도성 내외에 주호(酒戶)가 고작 백여 개여서 좋은 술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른 부(部)나 방(坊)이나 리(里)나 교외로 멀리 갔지만, 역시 큰 가게는 없었습니다.
근년에 이르러는 도성 백성들이 술을 좋아하는 풍습과 이익을 좇는 풍속이 나날이 바뀌고 다달이 달라져 5부 40여 방의 방방곡곡에 모두 주막 깃발이 꽂혀 있습니다. 10가구 동네에서 다섯이 주호라서 도성 내에서 하루에 빚는 술의 양이 밥을 짓는 것과 거의 비슷하니, 1년간 소비되는 것이 몇 만 석인지 알 수 없습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도성 사람들이 술을 마시려면 다른 동네로 가거나 한양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도성 내에도 많아져서 가까이서서도 얼마든지 술집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 이태배의 지적이다.
역사 기록에 나오는 '열에 한둘', '열의 서넛', '열의 대여섯', '열의 아홉' 같은 표현을 문자 그대로 10~20%, 30~40% 등으로 바꿀 수는 없다. 옛날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위 상소문에 나오는 "10가구 동네에서 다섯" 역시 마찬가지다. 열 집 중 다섯이 술집일 정도로 술집이 많아졌다는 의미로 당시 사람들은 받아들였다.
하멜 일행이 표착한 지 9개월 만에 조정은 그들을 도성으로 소환했다. 이 일행은 전라도 해남에 상륙한 뒤 나주-정읍-전주-공주를 거쳐 한양으로 이동했다. 효종은 이들을 경호부대에 배속시켰다. 이때는 이태배가 상소한 시점으로부터 수십 년 전이다. 이태배의 말에 따르면 도성 내외에 술집이 많지 않던 시절에 이 네덜란드인들이 한양에 도착했던 것이다.
술집이 많아졌다는 이태배의 지적은 영조 집권기 초반에 나왔다. 비슷한 언급이 52년간에 걸치는 영조 집권기의 중반에도 나왔다.
영조 24년 4월 30일자(1748.5.26) <승정원일기>에 성균관 종9품인 학유(學諭) 벼슬을 지내는 전의채(全義采)의 상소문이 나온다. 이 상소문에 "여럿이 술마시는 일이 날로 성행하고 주점이 날로 증가하여 시가지에서 주점이 열 집 중 여덟아홉"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시장 점포 열 곳 중에서 여덟아홉이 주점일 정도로 술집이 많아졌다는 지적이다.
그런 주점의 상당수는 여성이 운영했다. 이 점은 정조 때 종5품 도사(都事)를 지낸 김응두(金應斗)의 상소에 나타난다. <승정원일기>의 정조 16년 9월 1일자(1792.10.16) 기록에 따르면, 김응두는 여성이 운영하는 주점이 열의 대여섯이라고 말했다.
조선 후기에 여성이 운영하는 주점이 많았던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