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에 개봉해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에서는 영화 시작과 함께 조커(고 히스 레저 분)가 이끄는 강도단이 은행을 터는 장면이 나온다. 초반만 하더라도 호흡이 잘 맞던 강도단은 욕심 때문에 서로를 죽이기 시작하는데 사실 이는 모두 조커의 계획이었다. 조커는 은행장의 입에 폭탄을 물리고 가면을 벗어 얼굴을 드러내는데 이는 히어로 영화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등장신 중 하나가 됐다.

한국영화 중에는 역시 2013년에 개봉했던 한재림 감독의 <관상>에서 나오는 수양대군 등장신을 빼놓을 수 없다. 송강호, 김혜수 등과 함께 주연배우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고도 영화시작 50분이 넘도록 단 한 컷도 등장하지 않았던 이정재는 무려 57분 만에 웅장한 음악과 함께 수양대군으로 완벽하게 빙의해 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등장했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만으로도 관객들은 <관상>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물론 캐릭터의 등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감독들도 있지만 많은 감독들이 자신의 영화 속에서 주요 캐릭터들이 어떤 식으로 등장해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지 많은 고민을 한다. 지난 2004년에 개봉한 김태균 감독의 <늑대의 유혹>은 잘 만든 등장신 하나로 인해 20년 동안 관객들에게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늑대의 유혹>은 귀여니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들 중에서 유일하게 흥행에 성공했다.
<늑대의 유혹>은 귀여니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들 중에서 유일하게 흥행에 성공했다.(주)쇼박스
 
흥행 기복 심했던 인터넷 소설 원작 영화들

영화 제작사들은 언제나 출판계를 끊임없이 주시한다. 영화로 만들기에 손색이 없는 흥미로운 소재나 이야기가 있으면 판권을 사와 영화로 제작하기 위함이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PC통신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연재되는 소위 '인터넷 소설'들이 젊은 유저들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이에 영화 제작사들에서도 출판소설을 넘어 젊은 감각의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을 앞다투어 제작하기 시작했다.

2001년에 개봉한 곽재용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는 '견우74'라는 닉네임을 썼던 대학생 작가가 PC통신 나우누리에 연재했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였던 차태현과 전지현을 캐스팅한 <엽기적인 그녀>는 코미디와 멜로를 넘나드는 연출로 관객들을 열광시키며 서울에서만 173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발라드 황제' 신승훈이 부른 OST < I Believe > 역시 세대를 초월하며 크게 사랑 받았다.

신예배우 권상우를 스타로 성장시켰고 청순가련한 이미지가 강했던 김하늘의 코믹 본능을 이끌어낸 <동갑내기 과외하기> 역시 2000년대 초 나우누리에 연재됐던 <스와니-동갑내기 과외하기>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다. 2003년 2월에 개봉해 봄까지 장기흥행한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전국 493만 관객을 모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4년이 지난 2007년에는 이청아와 박기웅 주연의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2>가 개봉하기도 했다.

<엽기적인 그녀>와 <동갑내기 과외하기>라는 엄청난 성공사례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들이 모두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2004년 '살인미소' 김재원과 <다모>로 전성기를 달리던 하지원을 앞세운 <내 사랑 싸가지>는 두 주인공의 흥행파워 덕분에 전국 151만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부족한 개연성과 작위적인 코미디 때문에 평단은 물론 관객들에게도 썩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중학생 커플의 임신과 출산, 육아라는 무거운 주제를 하이틴 로맨스 장르로 풀어낸 <제니, 주노>는 인터넷 소설 원작으로 1년 전 <어린 신부>로 큰 성공을 거둔 김호준 감독의 차기작이었다. 또래 청소년 관객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비슷한 또래의 청소년 배우 박민지와 김혜성을 주연으로 캐스팅했지만 청소년들의 성관계와 리틀맘이라는 사회문제를 지나치게 가볍게 표현했다는 비판 속에 흥행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귀여니 소설 원작 영화 중 유일한 흥행작
 
 모델 출신의 신예배우 강동원은 <늑대의 유혹> 등장씬 이후로 2000년대 중반 최고의 꽃미남 배우로 떠올랐다.
모델 출신의 신예배우 강동원은 <늑대의 유혹> 등장씬 이후로 2000년대 중반 최고의 꽃미남 배우로 떠올랐다.(주)쇼박스
 
<늑대의 유혹>은 2000년대 초반 10대 여성 독자들을 겨냥한 로맨스 소설을 통해 젊은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던 귀여니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귀여니 작가의 소설은 2004년 <늑대의 유혹>을 시작으로 <그 놈은 멋있었다>, 2008년 <도레미파솔라시도>까지 세 편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중 흥행에 성공한 영화은 전국 218만 관객을 동원한 <늑대의 유혹>이 유일했다.

사실 <늑대의 유혹>이 개봉할 때만 해도 세 명의 주인공 중 가장 유명한 배우는 <논스톱3>를 통해 이름을 알린 반해원 역의 조한선이었다. 실제로 조한선은 <늑대의 유혹>에서 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매력을 보여주면서 정한경(이청아 분)의 남자친구가 됐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경과의 사랑을 이어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이 이야기하는 <늑대의 유혹> 최대 수혜자는 조한선이 아닌 정태성 역의 강동원이었다.

<늑대의 유혹>에서 이복누나 정한경을 사랑하는 정태성을 연기한 강동원은 한국영화 최고의 등장신 중 하나인 우산신으로 2000년대 중반 최고의 꽃미남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강동원의 우산장면이 나왔을 때 극장 안은 여성 관객들의 탄성으로 가득 찼다는 후문이다. 

1996년 장항준 감독이 각본을 쓴 <박봉곤 가출사건>을 연출하며 데뷔한 김태균 감독은 1998년 로맨틱 코미디 <키스할까요>에 이어 2001년 '한국형 학원무협'을 표방한 <화산고>를 만들며 주목 받았다. 2004년 <늑대의 유혹>으로 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감독에 오르는 듯 했던 김태균 감독은 2006년 <백만장자의 첫사랑>부터 2008년 <크로싱>, 2010년 <맨발의 꿈>, 2014년<가시>가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며 긴 슬럼프에 빠져 있다.

풋풋한 매력 돋보였던 신인 시절의 이청아
 
 이청아는 <늑대의 유혹>에서 두 미남배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고생 정한경을 연기했다.
이청아는 <늑대의 유혹>에서 두 미남배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고생 정한경을 연기했다.(주)쇼박스
 
<늑대의 유혹>은 <논스톱3>의 조한선으로 주목을 받고 강동원이라는 스타를 배출한 영화지만 실제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이청아가 연기한 정한경이었다. 정한경은 수줍음 많고 얌전한 성격이지만 남자친구 반해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진한 화장을 하고 나오는 의외의 면도 가지고 있다. 비록 '강동원 신드롬'에 가려 크게 주목 받진 못했지만 이청아 역시 풋풋한 매력을 앞세워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지난 2001년 드라마 <피아노>에서 자연스런 사투리 연기로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정다혜는 <늑대의 유혹>에서 한경의 새 아버지가 데리고 온 딸 정다름 역을 맡았다. 학교의 문제아인 해원 패거리들과 어울려 다니는 다름은 언니 한경을 괴롭힌 학우들을 응징해 줄 정도로 여학생들 중에선 적수가 없는 인물로 나온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늑대의유혹 김태균감독 강동원 이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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