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호는 현재도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최고의 배우지만 흥행성적을 기준으로 하면 송강호의 최전성기는 지난 2013년이었다. 송강호는 2013년 8월부터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와 한재림 감독의 <관상>,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까지 5개월 동안 세 편의 영화를 선보였는데 세 편 모두 900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국내에서 2013년의 송강호를 능가하는 흥행파워를 가졌던 배우는 지금도 찾기 힘들다.

사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 배우들에게는 그 배우의 이름만 걸려도 작품마다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최전성기가 있었다. 2010년 <블라인드 사이드>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산드라 블록에게는 1990년대 중반이 바로 그 황금기였다. 1994년 <스피드>로 스타덤에 오른 산드라 블록은 1995년 <더 네트>와 1996년 <타임 투 킬> 등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들이 잇따라 1억 달러 이상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산드라 블록은 줄리아 로버츠와 맥 라이언 등 앞 세대의 대세 배우들과 달리 액션영화 <스피드>를 시작으로 액션스릴러 <네트>, 법정스릴러 <타임 투 킬> 등 주로 장르물에서 강세를 보였다. 하지만 산드라 블록 역시 한창 주가를 올리던 1990년대 중반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영화에도 출연해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5년에 개봉해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던 <당신이 잠든 사이에>였다.
 
 산드라 블록을 전면에 내세운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산드라 블록을 전면에 내세운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월트디즈니
 
1990년대 할리우드의 대표 서브 남주

1953년생으로 어느덧 만 70세의 노장 배우 반열에 들어선 빌 풀만은 1986년 데니 드비토 주연의 <골치 아픈 여자>를 통해 영화 활동을 시작해 1990년대 초반까지 주연과 조연을 오가며 연기경력을 쌓았다. 풀만은 1992년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개최된 여성 야구리그를 소재로 한 톰 행크스와 지나 데이비스, 마돈나 주연의 <그들만의 리그>에서 지나 데이비스가 연기한 도티의 남편 밥 역을 맡았다.

풀만이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주목 받은 작품은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이 주연을 맡은 로맨스 영화의 명작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풀만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시애틀에서 날아온 라디오 사연에 흔들리는 여주인공 애니의 약혼자 월터를 연기했다. 풀만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시애틀남'에게 흔들리는 약혼녀를 보내주는 비운의 서브주인공 월터를 연기하면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게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풀만은 1995년 <당신이 잠든 사이에>에서 산드라 블록의 상대역 잭을 연기하며 서브 주인공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풀만은 이어 <꼬마유령 캐스퍼>에서 제임스 하비 박사 역을 맡았고 1996년 <인디펜던스데이>에서는 미국대통령을 연기하면서 '3연속 홈런'을 날렸다. 실제로 풀만이 <당신이 잠든 사이에>와 <꼬마유령 캐스퍼> <인디펜던스 데이> 세 편으로 기록한 흥행성적은 무려 12억 8700만 달러였다.

풀만은 1990년대 중반 세 편의 영화를 통해 단숨에 흥행배우로 떠올랐지만 아쉽게도 상승세를 계속 이어가진 못했다. 풀만은 1990년대 후반 <폭력의 종말>과 <플래시드> <브로크다운 팰리스> 등 주연을 맡은 영화들이 하나같이 흥행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다. 결국 풀만은 2000년대 중반부터 주연보다는 조연으로 출연하는 영화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관객들에게는 <인디펜더스 데이>의 대통령 이미지가 더욱 강하게 굳어졌다. 

풀만은 2016년에 개봉한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에서 연임에 성공한 전직대통령을 연기했지만 전편과 달리 <인디펜던스 데이:리써전스>는 3억 8600만 달러 흥행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1편의 흥행성적은 8억 1700만 달러였다). 1987년에 결혼한 풀만은 슬하에 1녀 2남을 두고 있는데 아버지에 이어 배우로 활동하는 막내아들 루이스 풀만은 2022년에 개봉한 <탑건: 매버릭>에서 로버트 밥 플로이드 역을 맡았다.

'짝남'이 잠들었을 때 동생과 사랑에 빠지다
 
 산드라 블록은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출연한 대부분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
산드라 블록은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출연한 대부분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월트디즈니
 
부모도 가족도 없이 고양이와 살고 있는 철도국 토크판매부스 직원 루시(산드라 블록 분)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열차를 타는 남자를 짝사랑한다. 하지만 어느 날 그 남자가 철로 위에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고 루시는 사랑의 힘(?)으로 남자의 목숨을 구한다. 남자와 병원에 온 루시는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가족들로부터 약혼녀로 오해 받고 얼떨결에 이를 인정하면서 졸지에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었던 피터(피터 겔라거 분)의 약혼녀가 된다.

피터는 혼자 사는 루시와 달리 부모님과 할머니, 형제, 남매 등 대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피터의 가족들은 루시를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하며 가족처럼 살갑게 대했다. 루시 역시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가족의 따뜻한 정을 느끼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렇게 '가짜 약혼녀' 행세가 익숙해질 무렵 루시 앞에 피터의 동생 잭(빌 풀만 분)이 등장했다.

루시는 혼수상태인 피터 대신 동생인 잭과 많은 시간을 보냈고 점차 잭에게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잭에 대한 마음이 커질 때 즈음 피터가 깨어났고 가족들에 의해 두 사람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하지만 루시는 피터와의 결혼식 날 하객들 앞에서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남자는 피터가 아닌 잭이라고 고백하고 '언제부터 잭을 사랑하게 됐냐'는 피터의 질문에 루시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미국의 영화평론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신선도 81%, 관객점수 79%, 국내  N포털사이트 네티즌 평점 9.05점, D포털사이트 8.8점을 받았다. 1990년대 중반 세계적으로 여성배우 중심의 로맨스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음을 고려하면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관객들로부터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은 셈이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국내에서도 서울에서 20만 관객을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를 연출한 존 터틀타웁 감독은 최소한의 제작비로 최대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1993년에는 1400만 달러의 제작비로 스포츠드라마 <쿨러닝>을 연출해 1억 5400만 달러의 흥행을 이끌었고 <당신이 잠든 사이에> 역시 최고의 라이징스타 산드라 블록을 캐스팅하고도 1700만 달러의 제작비 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2004년과 2007년에는 두 편의 <내셔널 트레저> 시리즈로 8억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런닝타임 2/3를 누워서 연기한 배우
 
 피터 역의 피터 갤러거(왼쪽)는 영화 내내 혼수상태인 채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피터 역의 피터 갤러거(왼쪽)는 영화 내내 혼수상태인 채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월트디즈니
 
<당신이 잠든 사이에>에서 동생 잭이 루시와 티격태격하면서 사랑에 빠지는 사이 피터는 철로에 떨어진 후 의식을 잃어 졸지에 동생에게 사랑을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피터를 연기한 배우 피터 갤러거 입장에서는 영화 후반 의식을 되찾을 때까지 침대에 누워 눈만 감고 있으면 되는 편안한(?) 연기를 했다. 실제 이름과 같은 피터를 연기한 피터 갤러거는 배우뿐 아니라 음악가, 성우, 각본가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팔방미인'이다.

얼떨결에 피터의 약혼녀라고 거짓말을 한 루시는 곧바로 모든 사실을 알리려고 했지만 심장이 좋지 않은 할머니 엘시가 충격을 받을까봐 쉽게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루시는 결혼식장에서 피터가 아닌 잭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도 할머니의 건강을 가장 먼저 걱정했지만 할머니는 루시의 고백을 카메라에 담으며 '건재'를 보여줬다. 할머니 엘시를 연기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배우 글리니스 존스는 지난 4일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76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와 1989년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의 <레드 히트> 등에 출연했던 고 피터 보일은 <당신이 잠든 사이에>에서 피터와 잭의 아버지 옥스를 연기했다. 피터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주인공의 다정한 아버지로 루시를 크리스마스 가족파티에 초대했다. 옥스는 결혼식 날 루시가 "전 가족 여러분들과 사랑에 빠졌어요"라고 하자 "나하고 사랑에 빠졌다고?"라고 주책 맞은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당신이잠든사이에 존터틀타웁감독 빌풀만 산드라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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