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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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에서도 묘사됐듯이, 전두환은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에 대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내는 데 애를 먹었다. 1994년 10월 29일 서울지검이 발표한 '12·12사건' 수사 결과에 따르면, 1979년 12월 12일 초저녁부터 전두환의 재가 요청에 시달린 최규하가 연행 보고서에 결국 서명한 것은 13일 새벽 5시 10분이 지난 뒤였다. "사태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재가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건의를 받은 직후였다.
재가를 어렵게 받아낸 전두환은 최규하가 그 뒤 8개월간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것을 지켜봤다. 최규하는 1980년 8월 16일 사임했고, 전두환은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의 국가원수 추대 결의(8.21)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 선출(8.27)을 거쳐 9월 1일에 대통령이 됐다.
정승화가 연행된 1979년 12월 12일과 최규하가 사임한 1980년 8월 16일 사이에는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다. '서울의 봄'으로 불리는 격렬한 민주화 투쟁이 상반기에 계속됐고, 전두환의 제2차 정변인 5·17 쿠데타가 있었다. 제1차 쿠데타가 전두환의 군부 장악을 위한 것이었다면,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로 불린 제2차 쿠데타는 전두환의 행정부 장악을 위한 것이었다.
5·17 다음날부터는 광주에서 대학살이 벌어졌고, 계엄군이 전북도청을 탈환한 5월 27일에는 비상정부를 신설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령이 의결됐다. 31일에는 이 설치령에 따라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이 됐다.
국보위 설치령 제1조는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국책 사항을 심의"하는 기관으로 국보위를 규정했다. 국보위가 실질적인 국가 최고기관이 됐던 것이다.
그런데 최규하 대통령이 제3조에 따라 국보위 의장이 됐지만, 제4조에 따라 국보위 권한이 상임위원회에 위임됐기 때문에 실질적인 정부 수반은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이 이 지위를 확보한 뒤에 최규하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고 전두환이 그 자리에 가게 됐던 것이다.
최규하의 대통령직 수행을 쿠데타 이후 8개월간 지켜본 전두환과 달리, 강조는 대궐을 장악한 날에 목종을 폐위하고 뒤이어 살해했다. 이런 '시간차'는 지금의 쿠데타와 왕조시대의 쿠데타가 갖는 결정적 차이점 하나를 반영한다.
지금의 쿠데타와 왕조시대 쿠데타의 결정적 차이
혁명은 새로운 합법성을 만들어내는 반면, 쿠데타는 기존의 합법성에 의존한다. 대개의 경우에 쿠데타군은 군사력에서는 혁명군을 능가하지만, 신질서 수립에 필요한 대중 동원력이나 이념 창출 능력에서는 혁명군에게 현저히 뒤진다. 그래서 쿠데타군은 기존 체제의 도움이 없으면 합법성을 표방하기 힘들다. 외형상으로도 합법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정부군의 역습이나 새로운 쿠데타에 쉽게 노출된다.
정부군과 반군이 충돌한 12월 12일 저녁과 밤중의 그 긴박한 순간에도, 전두환은 서류를 들고 청와대를 들락거리며 '도장 좀 찍어달라'고 거듭거듭 호소했다. 이 장면에 더해, 전두환이 최규하를 그 뒤 8개월간 지켜보는 장면은 쿠데타군이 기존 체제의 합법성에 얼마나 크게 의존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일은 박정희 때도 있었다. 윤보선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것은 5·16쿠데타 10개월 뒤인 1962년 3월 22일이다. 다음날 박정희는 대통령권한대행에 취임했고, 이듬해 12월 17일 대통령이 됐다.
지난달 18일 방영된 <고려거란전쟁> 제3회는 강조의 쿠데타로 인해 김치양 부자가 목숨을 잃고 천추태후와 목종 모자가 유배를 떠나는 장면이 묘사됐다. 기존 군주가 쿠데타 성공 직후에 이런 상황에 내몰리는 일은 왕조시대에서는 비일비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