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그녀에게>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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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이 아래로 하염없이 떨어지고 나면 한동안 그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바닥에 닿아 주저앉은 현실과 달리 자신의 마음은 아직 그렇게까지 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껏 함께 숨 쉬던 세계가 이제 자신을 내려다보는 느낌. 이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우리는 인식과 수용이라고 부르지만 막상 받아들이기는 어렵기만 하다.
걱정을 핑계로 주변에서 쏟아지는 참견들 역시 이들 가족에게는 큰 상처다. 가족은 가족대로 친구는 친구대로, 하지 않아도 좋을 괜한 노력을 위한답시고 해온다. 아무런 선택도 결정도 하지 못하는 혼란 속에서 길잡이가 되려는 이들의 말과 행동이 두려움이 된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 필요할 경제적 문제와 언제 나을 수 있을지, 나을 수 있기는 한 것인지 삼켜지지 않는 두려움이 삶 속에 혼재한다. 무엇보다 가장 슬프고 힘이 드는 건, 자신들과 다른 지우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멀리하는 또래들의 모습을 마주할 때다.
영화라는 인물, 상연이 대학 시절 학보사 활동을 하며 알고 지냈던 선배의 존재는 그래서 중요하다. 장애 아이를 키우는 동일한 상황을 먼저 지나온 그녀의 존재는 무엇 하나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너져 있던 상연을 다시 일으키고 붙잡는다. 적극적이고 강한 유대와 연대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자신이 앞으로 걸어야 할 지난한 과정을 먼저 걸어간 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연에게는 힘이 된다. 훗날 영화의 마지막이 되면 그녀 역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영화와 같은 대상으로 비슷한 역할을 해낼 수 있게 되는데, 이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다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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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는 동력이라고 할 만한 게 특별히 따로 필요하지 않다. 그저 극이 새로운 상황을 하나 둘 더해나갈수록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흘러나간다. 물론 그 상황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수렁은 점차 더 깊어지기만 한다. 현재의 상황에 최대한의 노력으로 적응하고 또 적응하는 가족이지만 애석하게도 말이다. 지우를 일반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난 이후의 상황은 더욱 어렵기만 하다. 이제 문제는 더 이상 가족이 통제할 수 없는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장애 등급 판정 문제와 비슷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부모의 극단적 선택을 보도하는 뉴스, 어려움을 호소하는 선생님과 퇴학 건으로 진정을 넣으려던 같은 반 학부모들까지. 상연에게는 어느 하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자리가 없다.
쌍둥이, 아이가 둘이라는 것도 어려운 문제가 된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라면, 다른 어려움이 없다고 해도 부모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가족에게 지수는 언제나 두 번째다. 아니, 두 번째도 아닌 관심을 가져줄 수 없는 대상이다. 영화는 그런 상황 속에 내몰린 지수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포착해 낸다. 엄마 앞에서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며 모든 걸 홀로 감내하려는, 진짜 속마음은 드러내지 않으려는 작은 존재.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엄마인 상연이 안고 있을 심연의 깊이만큼이나 그 슬픔의 무게를 가늠해 보게 된다. 언제나 동생 지우만을 바라보고 챙기는 엄마, 하나의 엄마를 두고 언제나 양보할 수밖에 없는 그 세상 바깥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