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거란 전쟁>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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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란의 최대 수혜자는 거란족
기원전 111년에 한무제가 남월을 멸망시킨 이래로 중국의 직간접적 지배를 받은 베트남에서는 중국 세력에 맞서는 응오꾸옌이 939년에 왕을 칭할 정도로 강해졌다. 응오꾸옌의 칭왕이 있은 뒤인 966년에는 딘보린이 칭왕보다 더 나아간 칭제를 하며 황제국을 선포했다. 딘왕조(966~980)의 시작이다.
베트남 북쪽인 지금의 중국 윈난(운남)에서는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다가 938년에 대리국이 세워졌다. 이 나라는 몽골 쿠빌라이칸에 의해 1253년에 멸망할 때까지 3백여 년간 이어졌다.
이 같은 대혼란의 최대 수혜자는 거란족 요나라다. 이 나라는 이전의 유목민들이 시도하지 못한 방식으로 만리장성을 넘어 남하하는 데 성공했다.
종전의 유목민들은 개별적 혹은 소규모로 만리장성을 남하해 중국에 정착한 뒤 서서히 힘을 길러 자신들의 왕조를 세웠다. 다섯 유목민족이 북중국에 16개 왕조를 세운 5호 16국 시대(304~439년)는 그런 현상의 결과물이다.
이와 달리 거란족은 자신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만리장성 이남을 정복했다. 이 전철을 밟은 것이 여진족과 몽골족이다. 거란족은 10세기의 대혼란을 이용해 유목민의 중국 정복에서 선구적 발자취를 남긴 민족이다.
국가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집단이다.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그 같은 국가권력들이 서기 10세기 동아시아에서 대대적으로 동요했다. 한두 곳도 아니고 아시아 동부가 그런 격변에 휩싸였다. 서기 10세기 사람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대혼란은 당나라가 약해지면서 곳곳에서 분출됐다. 당나라의 쇠망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 말기에 지방장관인 절도사들이 발호하면서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진 것과 무관치 않는 현상이다.
절도사들의 할거로 인해 국경 밖에 대한 당 왕조의 영향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궁예와 견훤이 중국의 개입에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활약한 데는 이런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혁명에 실패한 19세기의 전봉준이 누리지 못한 이점을 서기 10세기 반정부 지도자들은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절도사들의 발호로 인한 정치적 혼돈은 당나라 뒤에 등장한 송나라가 문치주의를 강화하는 동기 중 하나가 됐다. 칼을 쥔 지방장관들로 인해 세계적 왕조가 멸망에까지 도달한 경험은 송 왕조가 붓을 쥔 신하들을 더 선호하게 만들었다. 이는 송나라의 군사력이 약해져 유목민의 침입에 더 쉽게 노출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서기 10세기의 이 혼란은 동아시아를 움직이는 힘의 축도 바꿔놓았다.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9세기까지 동아시아를 주도한 양대 세력은 중국 왕조와 서북쪽 유목민들이다. 중국 황하를 기준으로 9시~12시 방향에 있는 유목국가들이 동아시아 최강국 지위를 놓고 중국 왕조와 경쟁하는 양상이 이 기간에 전개됐다. 흉노족·선비족·돌궐족·위구르족의 중국 압박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났다.
9~12시가 강했던 그 시절에 고구려는 0~3시 방향에 있었다. 0~3시가 강해지기 힘든 시절에 고구려는 예외적으로 막강한 국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시운과 대세가 이롭지 못해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했다. 고구려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에도 동아시아를 움직이는 두 힘은 9~12시와 중국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