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잠>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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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포기해서 쉬운 거야. 가족은 쉽게 포기하면 안 돼."
한편, 이 영화는 매 장(章)이 시작되는 장면에서 긍정적인 메시지가 내포된 새로운 시작점(1장의 아침, 2장의 출산, 3장의 완치)으로 구성되고 있다. 이 시작점은 이전에 주어졌던 장면을, 마치 꿈에서 깨어난 이후의 모습을 묘사라도 하는 듯이, 분절시키고 앞으로 나아간다.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이 시작은 각각의 이야기를 지나는 동안 또 다른 문제로 발화되는데, 이 과정에서 또 하나의 공백이 발생하는 구조가 형성된다. 무대 위의 연극에서 막과 막 사이에 존재하는 암전의 공백과 유사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세 개의 큰 장(章)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시각적 공백, 인지적 공백과 더불어 '공백'이라는 개념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로 포집할 수 있게 만든다.
영화의 구조적인 지점과 외적인 지점에서 '공백'이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부여하고 극의 서스펜스를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면, 내부의 인물들에게 있어서는 불안을 일으키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현수와 수진 사이에서는 그의 행동 장애가 완치될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고 완치를 장담할 수 없다'는 부분이 이 공백의 핵심이 된다.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으나, 아내의 입장에서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이 기억하는 진짜 남편의 공백, 부재를 경험하게 되는 셈이다. 극의 후반에서는 이를 빙의된 존재, 아랫집 할아버지의 영혼으로 이어낸다.
극 중 인물들이 경험하게 되는 공백은 자연스럽게 모든 상황을 홀로 감내해야 하는 아내 수진의 불안으로 연결된다. 실제로 그녀는 2장(章)의 중반부까지 가족은 쉽게 포기해선 안된다며 남편의 불안까지 떠안으려는 용기 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자신은 물론 딸까지 위험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 점차 그 불안에 잠식당하기 시작한다. 후반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살(김금순 분)과 미신에 대한 내러티브가 바로 이 틈에서부터 시작된다. 영화의 뼈대 위에서만 보더라도 한번 시작된 불안은 가족의 믿음과 수진의 사랑이 있던 자리에 불신과 맹신으로 채워 넣는다.
04.
영화 전체의 형태를 다시 생각해 보면, 내내 지켜지던 부부의 믿음과 사랑이 2막 후반과 3막 초반에 이르러 해체되었다가 마지막에 다시 연결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남편이 잠이 들어 있던 사이 몰래 신굿을 벌이고 몸에 부적을 새기는 수진은 물론, 아내를 홀로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시키는 현수의 행동 모두는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가 없다'던 두 사람의 다짐에 배반되는 행위다. 다시 말해, '포기해서 쉽다고, 가족은 쉽게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이라던 수진의 말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다. 표현 상 아랫집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덧씌워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사건을 마련하는 것은 극적 흥미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현수의 빙의 행위에 대해서도 실제가 아닌 아내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일종의 연극 치료, 함께 극복하는 과정으로의 회복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현수의 극 중 직업을 배우로 설정한 부분 역시 이 지점과 연결된다.) 그가 수면장애를 겪는 동안 공포의 대상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최대한 곁에 머물고자 했던 수진의 마음이 이 장면에서는 비이성적 믿음을 놓지 못하는 아내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려는 남편의 모습으로 이양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