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파이어> 언론시사회
장혜령
- 언론 시사회에서 아시아 최초 방문이고 한국을 첫 번째로 찾은 이유가 딸의 추천이라고 들었어요. 소감이 어떠신지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어요. 지하철에서 빨간 원피스를 입은 한 여성의 다리 타투를 유심히 보게 되었죠. 딸이 한국은 타투가 금지였던 나라라고 알려줬거든요. 그 여성분과 눈이 마주쳤는데 순간 웃고 있었어요. 제가 임산부석에 앉아 있어서인가 싶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같이 있던 남성이 여자친구라며 <옐라>의 주인공처럼 입고 있다고 말해주더군요. 그 순간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겪은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창동 감독, 오정미 각본가와 저녁 식사 자리였어요. 영화 제작에 대해 지체 없이 바로, 거침없이 술술 대화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좋아하는 감독님을 만나는 멋진 순간이었죠."
- 그동안 디스토피아 혹은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셨어요. <어파이어>는 전작들과 확연히 다른, 경쾌한 톤인데요.
"영화의 톤이 밝아도 현장은 무겁고 힘든 경우가 많은데요. <어파이어>는 가벼운 톤이지만 힘들지 않았어요. 팀이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 주었고 그게 영화에 잘 반영되어서 즐거운 경험이었죠."
- 역사 3부작이라고 불리는 <바바라>, <피닉스>, <트랜짓>에 이어 원소 3부작 중 <운디네>는 물을 주제로 하고, 이번 <어파이어>는 불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요.
"솔직히 전 무척 게으른 사람이에요. <운디네>를 만들고 성취감에 빠져 누워만 있고 싶어졌거든요. 역사 3부작을 마치면서 원소 3부작 아이디어를 떠올린 거죠. 공식적이라 어떻게든 하게 되는 거죠. 이제 '공기'를 주제로 한 영화가 남았는데요. 지금 인터뷰 중에도 바람도 불고 공기도 가득하고 어쩌면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겠네요. 3부작의 세 번째 영화보다는 다른 것을 먼저 만들지 않을까 싶어요."
- '불'은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호주에서 산불이 났었는데 코알라가 불이 붙어 죽는 장면을 본 적 있어요. 가족과 튀르키예 갔을 때도 산불로 폐허가 된 지역을 봤습니다. 생명체가 죽어있는 느낌이었고 아무 소리도 없었죠. 인간이 지구와 기후를 괴롭히는 대표적인 일이 산불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청년들이 와인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춤추며 즐길 수 있는 여름을 더 이상 갖지 못하겠다는 걱정이 컸던 것 같네요."
- '불'은 사랑이거나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죠. 영화의 결말이 모호하게 끝났습니다. 미래의 희망은 없는 건가요. 일부러 배제한 건지 궁금해요.
"어제 호텔방에서 차기작의 중요한 신을 썼어요. 평소라면 어려웠을 생각을 시차 때문에 5일 만에 쓸 수 있었죠. 딸은 제 영화 대부분을 슬퍼하는데 '아름답다'고 코멘트해 줬어요. 아마 다음 영화에서는 확신에 찬 희망을 볼 수 있을 겁니다(웃음)."
- 영화가 레온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초반에는 산불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알게 되는데요. 눈짓이나 시선을 통해 여운을 주는 특징이 좋았습니다.
"(선물 받은) 에릭 로메르 DVD에 작은 책이 같이 있었어요. 그 책에 '카메라의 위치는 도덕적 위치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죠. 영화란 자화상이에요. 우리는 레온도 아니고 영화도 레온이 아니죠. 오만하고 겁 많은 사람의 자화상이 영화예요. 객관적 현실과 레온을 통한 주체, 이 두 가지의 합입니다. 과거와 현재, 주체와 객체가 동시에 존재하는 게 영화의 본질인 거죠."
- 레온은 작가의식에 빠져 있는 서독 예술가의 나르시시즘이 느껴졌습니다.
"서독은 미국의 자본주의를 따랐고 동독은 러시아의 공산주의를 따랐잖아요. 저희 부모님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피난 오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동독 출신임에도 서독 출신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게 투영되었어요. 레온은 동독을 장난스럽게 다루고 미국인이 되고 싶어 해요. 이름도 미국식인데 아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만함을 드러낸 것 같습니다."
- 감독님의 작품이 베를린이나 발트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가요.
"베를린은 유년 시절을 보내서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운 도시였어요. 베를린에서 첫 영화를 촬영하기까지 거리 두기와 시간이 필요했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영화도 찍게 되었습니다. 발트해는 제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데요. 베를린 사람들에게 그리움의 바다예요. 베를린에 가기 위한 바다였는데요. 지금은 연결돼서 2시간 이내로 가능한 기차가 다녀요. 그리움의 공간이 영화를 위한 공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