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졍서, 졍서>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같이 공부해요.
인스타 팔로우 해줘.
자퇴했음. 대학질문 X
싸구려 커튼이 쳐진 독서실의 구석진 자리. 마스크를 쓴 영서(신혜지 분)가 핸드폰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화면 너머에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이 무언가 열심히 휘갈겨 쓴 노트를 연신 내보인다. 그녀는 지금 인터넷 방송 중이다. 소음을 낼 수 없는 독서실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직접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만 소통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오히려 작은 책상 위의 은밀한 관계가 그녀를 지켜보는 이들의 어떤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있는 듯하다. 그런 내막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서는 화면 너머의 시청자들이 제대로 보일 수 있게 좌우반전을 고려해 써야 하는 반대의 글씨도 개의치 않는 태도로 애를 쓰는 모습이다. 문제는 그녀가 무용으로 성공하겠다며 학교도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 이제 시험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적절한 방향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손현록 감독의 영화 <졍서, 졍서>에는 꿈 하나만을 바라보며 학교를 그만둔 이후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어버린 한 고등학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좁은 책상 위에 세워진 핸드폰 카메라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름 모를 이들과의 시간이 유일한 행복인 것처럼 비치는 그녀의 삶. 숨 막힐 듯 고요한 공간에서 유일하게 홀로 누군가와의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은 오롯한 자신의 선택만으로는 완성할 수 없는 현재를 비유적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필요와 일탈의 경계에서 합의된 유일한 자의적 행동으로 그려진다. 애석하지만, 작품 속 영서의 모습에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 하나로 제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는 존재의 어려움이 압축되어 있다.
02.
"니가 뭐 할 줄 아는 게 있기는 있어?"
여과 없이 현실에 그대로 맞부딪히게 되는 어른의 삶이 어려운 이유와 달리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이들의 삶에도 나름의 어려움은 있다. 누군가로부터 보호받는다는 일의 대가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제 멋대로 나아가고 싶은 시기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선택의 순간마다 부모의 이해를 구하거나 결정을 따라야 한다. 그나마 그 이해와 선택이 자신의 뜻과 동일한 방향을 향하고 있고, 그 결과가 긍정적인 값을 도출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물론 세상 어떤 부모가 나쁜 결과를 바라며 자식에 관한 결정을 내리겠는가. 문제가 있다면 양쪽에 시각적 차이가 있다는 것과 그에 대해서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 영서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도 다르지 않다. 자퇴를 결정하는 일에 동의한 것은 사실이나 이 문제는 애초에 학원 선생님(고유준 분)과 엄마(민효경 분)가 주도해 진행된 일이었다. 무용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으니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 수업에 집중해 조기 유학을 목표로 하자는 것. 결과적으로만 보자면 이 선택으로 인해 얻은 것은 부정적인 부분이 더 많아 보인다. 일단 학교로부터 멀어지면서 주변 또래로부터 단절되게 되었다는 것. 이로 인해 영서가 설 자리는 점차 좁아지기 시작하고, 무용 실력 역시 생각만큼 크게 늘지 않으면서 이쪽으로도 돌아갈 수 없고, 저쪽으로도 나아갈 수 없는 애매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사실 이 선택에 함께 참여했던 엄마와 학원 강사는 실질적인 피해를 거의 입지 않는다. 영서의 엄마는 학원비를 매달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금전적인 손해를 입기라도 하지만, 학원 강사는 정말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는다. 영서가 실패하면 다른 학생을 가르치면 되고, 그 학생이 실패하면 또 다른 학생을 가르치면 되니까. 그래서일까? 그는 학원을 찾아온 다른 학부모에게도 영서의 엄마에게 했던 조기 유학에 대한 제안을 똑같이 내놓는다. 선택은 다 함께 했는데 그로 인한 문제는 왜 전부 영서가 받고 책임져야 하는 것일까? 함께 나누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처음의 선택이라도 스스로 할 수 있게 해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