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에스트로> 스틸컷
(주)티캐스트
04.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질투와 복잡한 감정으로 어리석고 덧없는 길을 헤매는 동안 영화는 그들 곁에 머물고 있는 두 여인을 바라본다. 지휘자라는 직업 때문에 평생을 집 밖으로 나돌던 프랑수아를 평생 곁에서 지켜봤던 엘렌과 직업적 성취를 얻기는 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은 드니를 사랑해 온 비르지니다. 엘렌은 극장의 제안을 받은 직후의 프랑수아가 환희에 찬 모습으로 프러포즈를 해 오자, 자신은 그의 직업적 성공과 상관없이 항상 자랑스러웠다고 말한다. 비르지니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와의 일로 힘겨워하는 드니에게 그녀는 자신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된 것만으로도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응원의 말을 더한다.
두 여인이 가진 삶의 태도가 두 남자가 가진 태도와는 정확히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니와 프랑수아가 부자(父子)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분명 수직적 시각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누르고 일어서는 것이야말로 성취의 증명과도 같다고 여기는 시각. 아들은 여전히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고, 역시 아버지는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수직적인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엘렌과 비르지니는 그렇지 않다. 누군가의 자랑이 되는 것은 성취나 성공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며, 성공의 척도가 반드시 사회적이고 직업적인 측면에만 놓여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격자를 두 사람이 완전히 비틀어 놓는다.
05.
"아비로서 가장 큰 모욕이 아들에게 동정받는 거야."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의, 상부가 뾰족한 원뿔형 형태의 탑 모양은 처음 누가 생각해 냈을까. 그리고 사회의 경쟁 구조는 왜 하필 그런 모양을 닮아가게 된 걸까. 이제껏 모든 영광을 누려왔을 프랑수아에게 이 사건은 큰 충격을 주고 만다. 어쩌면 자신의 염원과는 무관하게 하나의 단상을 타인에게 빼앗겼다는 사실만큼이나 이제 자신이 내리막을 향해 걸을 때가 되었다는, 더 이상의 노력으로는 자신의 노력과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는 사건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아들과 마주한 자리에서 아버지 프랑수아는 왜 알고도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아들 드니다. 두려움이 문제냐고, 여전히 이 머리가 백발인 노인이 그렇게 두려워하느냐고 재차 묻는 아버지. 역시 아들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업계 최고로 알려져 있는 아버지를 핑계 대며 세계 최고의 무대에 서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냐고 프랑수아는 강하게 채근하지만, 이번에도 아들은 어떤 대답도 내지 못한다. 자신이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아버지가 이미 상처를 받았을 이 상황을 물릴 수도 없을 것이고, 또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기분에 맞춘 대답도 이제 와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니의 생각과 달리 프랑수아는 생각보다 큰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실망했고 허탈함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포기해야 하는 일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아는 연륜이고, 경력이 되었다. 전날 밤 아들을 강하게 밀어붙였던 것은 그가 어설픈 마음으로 이 업계를, 또 자신을, 세계 최고의 자리를 대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일 뿐이다. 지금은 환희가 앞에 놓여있다고 해도, 언제 다시 그 불꽃이 약해지고 세상의 관심과 환호가 사그라들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