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크리스마스가 따뜻한 이유는 말이죠,>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2.
최우진 감독의 영화 <크리스마스가 따뜻한 이유는 말이죠,>에는 자신이 만든 슈트가 추워서 걱정하는 다소 이질적인 히어로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인간적이고, 다시 한번 더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 앞서 거창하게 이야기했던 여러 영화 속 히어로들의 모습이 무색하고 민망할 정도다. 얇은 슈트의 떨어지는 보온성이 유일한 걱정거리인 히어로라니.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고, 날아오는 흉기를 피하는 등 탈인간적인 능력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는 어딘가 부족한 캐릭터. 영화는 이 치명적인 약점을 중심으로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에 살을 붙여 나가기 시작한다.
영화의 구조적 설정을 위해 기존 영웅의 이미지를 분해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들여다보는 부분은 두 가지다.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영웅에게도 어느 한 부분 약점은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것과 그 약점과 이면의 고민이 지극히 사소하면서도 인간적이라는 것. 전자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장르적 호흡에 맞닿아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감독 개인의 상상으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두 가지 모두를 새로운 것으로 비틀지 않은 이유는 영화가 히어로의 이미지 위에 최소한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인간적인 영웅', 혹은 '인간적이면서도 영웅의 면모를 가진'의 어구는 서로 상응할 수 없는 배반의 위치에 놓여 있지만 각각의 요소를 하나의 캐릭터에 절반씩 이식함으로써 극 중 '레드'라는 인물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역시 이후의 러닝타임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게 되는 것은 후자인 비틀어진 지점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관객이 이해가능한 영웅적 면모에 대해서는 기존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가는 셈. (후반부에서 최소한의 설명을 위한 모션 픽쳐 신을 통해 그려진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영웅이 되었지만 아직 인간적인 고민을 가진 한 인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과도 같다. 영웅의 면모를 가진 한 인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타인의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다른 히어로 영화와는 다르게 말이다.
03.
그 과정에서 선택되는 것은 온라인 커뮤니티다. 히어로 '레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에 고민을 나눠보라는 전문가의 제안에 따라 유진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슈트가 추워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을 공유한다. 그의 고민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 채 12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전국 각지의 전문가들이 그를 돕겠다고 나선다. 동시에 시작된 카페 모금을 통해 슈트 제작에 필요한 충분한 금액도 모인다. 영웅이 세상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게 된 셈이다. 이 과정에서 타인의 순수한 도움과 선의 아래에 놓이는 뒤틀림은 조금도 없다. 영화는 그저 영웅도 인간도 서로 함께하고 돕는 과정에서 더 크고 넓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커뮤니티, 특히 온라인상에서 조직된 커뮤니티의 선기능에 대한 믿음이다. 감독은 자신의 연출 의도를 통해 어떤 분야든 '덕후'들이 연대했을 때 그것이 곧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밝히고 있지만 오프라인의 그것에 비해 온라인의 생리는 조금 더 거칠고 어려운 면이 있다. 짐작만으로 인지해야 하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불안과 쉽게 모이고 흩어지는 온라인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영화는 영웅이 그런 불안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위해 어려움 속으로 뛰어들듯이 사회 역시 영웅을 위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음을 이 설정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실제로 영화는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을 위해 대가도 없이 모금을 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들의 모습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지는 레드의 모습을 그린다. 자신의 경우에는 영웅이라는 이름의 존재적 사명감이라도 갖고 있지만 그들은 그렇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말이다. 이 장면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보상을 바라고, 대가를 먼저 챙기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에 대한 감독의 물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여기에는 연대의 힘에 대한 믿음도 필요하다. 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라도 개인의 외로운 고군분투보다는 함께인 세상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영화의 주된 소재인 단어를 두고 치환하자면 '혼자서 만든 슈트보다는 여럿이 함께 만든 슈트가 훨씬 더 뛰어나다'가 될 수 있겠다. 기술적, 기능적 측면과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요청과 그에 응답하는 전체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속에서 하나의 커뮤니티가, 조금 더 나아가 사회 전체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며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 이 지점에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