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침묵>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02.
이 영화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초반부에서 등장하는 취조 장면에서부터 내막이 드러나는 듯한 후반부의 장면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신에서도 정확한 증거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형사들이 이월을 정연의 죽음에 대한 가해자로 의심하는 과정에도, 이월이 정연의 아버지를 피의자로 진술하는 지점에도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는 없다. 형사는 단지 이월이 부모도 없이 수녀원에서 자란 환경을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더 좋은 성장 배경을 갖고 있는 친구에 대해 열등감을 느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이월 역시 그 은밀한 장면을 다른 목격자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홀로 목격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실제 현장 조사 결과 이와 관련한 물품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진술의 신뢰성에 대한 의구심으로 벗어날 수 없는 상태다.
아직 추측으로만 존재하는 이월의 열등감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은 영화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부터다. 감독은 피아노가 매개가 되어 만나게 되는 이월과 정연의 모습을 이 시점에서부터 조금씩 꺼내기 시작한다. 자라온 환경과 상황은 다르지만 각자의 사정 속에서 그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어 했던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빠르게 가까워지도록 만든다. 문제는 그 중심에 놓여있던 피아노라는 대상에 대한 각자의 마음이 너무 거대했다는 사실이다. 진흙탕 같은 인생 속에서 유일한 동아줄처럼 붙들고 있던 이월에게도, 자신을 죽여서까지 아내를 되살리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폭력 아래에 놓여있던 정연에게도 피아노와 관련된 모든 것은 어떻게든 움켜쥐어야 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03.
"이월아, 세상에서 네가 제일 불행한 것 같지? 아니야. 너만큼 나도 사는 게 지옥 같아."
그러니까 이 영화가 두 인물의 모습을 통해 열등감이라는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서로를 향해 있던 감정을 날카롭게 세운 다음, 하나의 칼날을 부러뜨리고 남게 된 나머지 하나의 칼날에 사건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 이때 부러뜨리는 쪽의 칼에 더 나은 조건을 부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약한 칼날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것. 두 사람 사이의 일을 전부 알 수 없는 형사의 의심이 반쪽짜리 의혹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이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영화는 어느 곳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떠도는 듯한 이월이 정연에게 마음을 조금이나마 붙이도록 만든다.
처음에 언급했던 영화가 바라보는 두 가지 요소 가운데 열등감과 관련한 지점의 시선이 이월과 정연 두 인물 사이에서 그려진다면, 하나의 대상을 평가하는 비이성적인 태도에 대한 감독의 시선은 이월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통해 표현된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기는 했으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가운데 배경적 요소를 배제한 채로 이월을 바라본 인물은 정연이 유일했을 정도다. 폭력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하면서까지 일진 무리 아이들에게 담배를 팔던 그녀를 단순히 나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똑같은 나쁜 아이로 바라봤던 배경에도 순수하지 못한 시선이 담겨 있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정확하게 드러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이월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태도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급격히 바뀌기 시작한다. 마치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그 어떤 증거도 없이 의혹은 곧 진실이 된다. 그녀의 존재가 자신들에게 해가 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 아니 수녀원의 수녀와 신부들이다. 내몰리고, 내몰리고, 또 내몰리고.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나마 유이했던 사랑인 피아노와 친구 정연으로 인한 아픔은 그동안 쌓아왔던 분노를 더 이상 누를 수 없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