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장은 그저 흘러가지 않는다. 읽고 난 뒤 마음 깊이 가라앉아 두고두고 중력을 발한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좌우명이라 하고, 또 누구는 신조라 하며, 또 누구는 좋아하는 문장이며 이야기라고 한다. 내게도 그와 같은 것이 몇 개쯤 있다.

벌써 30년 전 처음 읽고 수시로 다시 들춰보는 책으로 <맹자>가 있다. 맞다. 공자, 맹자 할 때 바로 그 맹자, 즉 맹가의 말씀을 모은 책이다. 그가 고자와 나눈 문답을 기록한 '고자장구' 상편 가운데서 '사생취의(捨生取義)'란 말이 등장한다. 나는 이 말을 잊지 못한다. 잊지 못할 뿐 아니라 삶의 중간중간, 주요한 선택의 기로마다 이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사생취의가 무슨 뜻인가. 직역하자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목숨도 의로움도 모두 좋은 것이지만 둘 중 하나밖에 갖지 못한다면 기꺼이 의를 취해야 한다는 얘기다. 인간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이 바로 삶이 아닌가. 그 삶을 바쳐 취할 의를 구하는 것이 맹자가 생각하는 군자의 도인 것이다. 선택의 순간마다 어느 것이 의로움인가를, 또 그를 위해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가를 묻게 되는 건 고단하지만 멋진 일이기도 하다.

인간을 살아있게 하는 것

이키루 스틸컷

▲ 이키루 스틸컷 ⓒ 도호


<이키루>를 보며 사생취의, 네 글자가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다. 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가 삶을, 죽음을, 선택과 의미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노년의 공무원을 주인공으로 한 이 작품은 그의 다시 태어남을 명백히 그림으로써 그가 지나온 거의 전 생애보다 마지막 몇 주, 아마도 앞의 시간보다 수백분의 일 정도에 불과할, 삶의 무게가 더 무거움을 내보인다. 그로부터 진짜 인생은,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인다.

그럼에 영화의 제목인 '이키루(いきる)', 즉 '살다'는 말은 그저 생존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주인공의 재탄생, 즉 진짜 살아있음이란 무엇인가를 내보인다.

주인공은 나이 지긋한 구청 공무원 와타나베 겐지(시무라 다카시 분)다. 시민과 과장으로 일하는 그이지만, 무슨 업무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매일 앉아 서류에 도장을 찍기만 하니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민과를 비롯해 구청의 온갖 부서가 '무사안일'이며 '복지부동'이란 말로 요약되는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관료 집단의 전형이 따로 없다. 영화의 배경이 2차대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니, 구로사와 아키라가 공직사회를 이처럼 묘사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영화는 구청 공무원들의 업무방식을 유쾌하면서도 통찰이 엿보이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어느 날, 여러 여자가 구청을 찾아 민원을 접수하려 한다. 공터에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처리하는 방식이 가관이다. 시민과에선 공원과로, 공원과에선 보건과로, 보건과에선 위생과로, 위생과에선 환경위생과로, 다시 방역과, 충역과, 하수과, 도로과, 도시계획과, 소방과, 아동복지과, 마침내 시의회까지 가서 부시장에 이르고 부시장은 다시 시민과로 민원인들을 안내한다. 같은 사안으로 구청 한 바퀴 뺑뺑이를 도는 데 온 종일을 쓰고도 부족할 지경이다.

매너리즘 가득한 공무원 사회

이키루 스틸컷

▲ 이키루 스틸컷 ⓒ 도호


물론 이유는 있다. 각 부서가 놀이터 건설과 그에 선행돼야 할 공터 정비, 또 위생이며 아동문제 등 다양한 사안에 발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총대를 메지 않고 제 부서에 꼭 알맞은 일만 가져오길 요청하니 힘없는 민원인들로선 애를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민원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를 떠올리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직의 견고한 매너리즘은 조직원들을 물들게 한다. 처음엔 서로 달랐을 이들이 조직에서 일하는 동안 구별하기 어려운 얼굴이 된다. 하나같이 책상에 서류 더미를 높이 쌓아 올린다. 말단 사무 여직원 도요(오다기리 미키 분)의 말을 빌리자면 서류를 쌓아놓지 않으면 한가한가 보다 하고 일거리를 던지기 때문이란다. 별로 할 일이 없어도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쓰는 척 연기하는 건 덤이다. 이처럼 시간을 보내면서도 진짜 중요한 일은 무엇도 하지 않고 서류만 보다 퇴근하는 것이 이들의 일상이다.

그러나 마침내 그 사건이 닥쳐온다. 몸이 불편해 병원을 찾은 와타나베가 시한부 통보를 받게 된 것이다. 위암 말기로 길어야 3개월,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와타나베는 그야말로 충격에 휩싸인다. 하나뿐인 혈육인 아들에게 털어놓으려고도 해보지만 아들은 제 재산에만 관심이 있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한 채로 와타나베는 밖으로 돈다.

당장 출근하지 않았지만 갈 데가 없다. 취미도, 친구도 없이 평생을 산 그가 아닌가. 우연히 만난 작가와 어울리게 되어 도박장과 술집, 매음굴을 다녀보지만 그 또한 영 마음에 붙지 않는다. 죽음은 갈수록 선명해지고 불안 또한 커져만 간다. 그러다 그녀를 만나게 된다. 앞서 적었던 말단 직원 도요다.

거리에서 만난 도요가 와타나베를 알아본다. 마침 그를 만나러 가던 길이란다. 사직서를 내려 하는데 과장의 직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옮길 직장까지 알아봐 뒀다는데 그가 오지 않으니 얼마나 마음이 답답했을까. 지금처럼 개인 전화기가 터지는 시대도 아니잖은가. 직장에서도 제대로 말을 섞어보지 못한 과장님을 찾아 그의 집까지 걸음 한 데는 이런 사연이 있는 것이다.

비좁은 사고의 틀을 넘어 바라보자면

이키루 스틸컷

▲ 이키루 스틸컷 ⓒ 도호


그로부터 영화는 와타나베가 도요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생에의 의지를 되찾는 과정으로 화한다. 나이 든 남자가 젊은 여자와 거리며 가게를 함께 활보하는 모습이 그 시절 분위기를 생각하면 더욱 낯설게 다가온다.

가뜩이나 장면을 한껏 극화시켜 연출하길 즐기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메라를 통하여선 와타나베와 도요의 모습이 어딘지 이질적이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죽음과 불안, 공포 따위가 뒤엉킨 와타나베의 상황이 그로 하여금 자신이 바깥에 어떻게 보이는지를 인지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일 테다. 설사 그를 의식한대도 무엇이 달라질까. 고작 한두 달 남은 삶이다. 세간의 평가 따위야.

이러한 연출로 인해 어떤 사람은 나이 든 남자와 어린 여자의 부적절한 관계를 불편하게 그렸다는 식으로 작품을 오독할 수도 있다. 때때로 마주하는 이 같은 오독이 어째서 이뤄지는지는 명백하다. 와타나베가 삶에 대한 의욕을 되찾는 직전 장면이 카페 2층에서 도요와 나눈 대화란 점, 집에 가겠다는 그녀를 붙들고 온갖 이야기를 들은 뒤에 얻은 변화였단 점, 이 장면이 구로사와 아키라 특유의 극화된 연출로 비장하게 그려졌단 점, 그런 그의 모습에 도요가 흠칫 놀라 물러난다는 점 등이 나이든 직장 상사와 젊은 여성의 성적 접촉에 집중하는 관점에 집중하여 보자면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와타나베와 영화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겠으나, 영화 속 와타나베의 아들이며 이웃들의 불편한 눈길을 떠올리면 그 같은 오독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렇다 해도 명백한 오독인 것은 변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 공무원이 놀이터 만들기에 삶을 건 이유

이키루 스틸컷

▲ 이키루 스틸컷 ⓒ 도호


<아키라>는 생에의 의지를 되찾은 와타나베가 공터에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앞장서 노력하는 과정을 놀랍게도 완전히 생략한다. 곧장 그의 장례식으로 뛰어넘어가더니 그에 참여한 자들의 회상을 통하여 생전 그가 보낸 마지막 몇 달을 조명하는 것이다. 그 시간은 대체 얼마나 감격적이었던가.

처음엔 공원을 짓는 일에 들인 와타나베의 공적을 무시하던 이들이다. 부시장은 와타나베는 담당 부서 장이었을 뿐이라며 제가 공적을 가로채려 한다. 또 다른 부서장은 시민과 외에도 다른 과의 역할도 있었다고 말한다. 와타나베가 제 죽음을 미리 알았으리란 추측이 나온 뒤엔 그가 아닌 다른 누구래도 마찬가지로 열성을 보였으리란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그가 했던 일화가 하나씩 드러날수록 와타나베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이 드러난다. 또 그 선택 하나하나가 비범했다는 것도. 공원 과장을 붙들고 결정을 받아내려 사정하고, 부시장 앞에서도 지극히 이례적으로 "한 번만 더 재고해 달라"고 사정한다. 이권이 개입된 이들이 찾아와 협박할 때도 굴하지 않았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절차에도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마치 필생의 숙원처럼 놀이터 만들기를 진척시켜 간다.

생애 마지막 얼마 동안 와타나베는 일생 단 한 번도 도전하지 않았던 체제를 향해 온몸으로 대항한다. 감히 의문을 품지도 않고 벗어나려 하지도 않았던 체제의 민낯이 그의 도전으로 진면목을 드러낸다. 그는 기다리고 찾아가고 거듭 고개를 숙이며 일을 진행해 나간다. 마침내 부시장이 재고해 승인하게 되고 일은 이루어진다. 놀이터가 세워진다.

절망이 아니다, 희망이다

이키루 포스터

▲ 이키루 포스터 ⓒ 도호


<아키라>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에 의해 리메이크된 <리빙: 어떤 인생>에 비해 어둡고 칙칙하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그의 죽음 뒤 공적을 가로채고 온갖 오해와 오독을 일삼는 주변인들의 모습을 길게 배치한 것은 분명히 절망적이다. 겨우 타성에 젖지 말고 와타나베의 모범을 받들자 결의한 시민과 구성원들조차 다음날 그 결의를 잊은 듯 행동한다는 결말 또한 절망적인 해석에 무게를 더한다. <리빙: 어떤 인생>이 영화를 리메이크하며 이 대목과 주인공의 마지막 행복했던 순간의 순서를 바꾼 것도 이 같은 절망을 덜고자 함이었을 테다.

그러나 나는 달리 말하고 싶다. <아키라>는 절망과 동시에 선명한 희망 또한 말하고 있다고 말이다. 죽음 앞에 선 와타나베는 꺼져가는 생을 붙들고 서서 아직 할 일이 있음을 깨닫는다. 제 삶을 건져낼 기회가 남아 있음을 알아챈다. 늦었지만 완전히 늦지는 않았다고, 그는 연신 '할 수 있어!'를 되뇌며 계단을 내려간다. 그 뒤로 '해피버스데이투유'하는 노래가 울려 퍼진다. 그 노래를 계단을 오르는 철없는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이 예순이 넘어 산다는 게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된, '청춘'이란 두 글자를 가슴에 품은 와타나베를 위한 것이다. 죽음 앞에서야 그는 새로 태어난 것이다.

남의 공적을 빼먹고, 귀찮고 버거운 일은 피하며, 타성에 젖어 사는 대로 사는 삶이 온 세상에 퍼져 있다. 영화가 그린 결말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냉철한 시선이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달랐다. 제 삶을 건지기 위해 비로소 온갖 불편과 타성을 기꺼이 깨부수려 했다. 그건 그대로 부조리한 현실을 타개할 방책이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진정으로 던지고자 한 메시지는 과거로 돌아가는 주저앉음이 아닌, 생의 끝자락에서 저를 일으킨 용기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도, 감독이 전하려 한 것도 바로 이것이니, 나는 이 영화가 희망찬 걸작이라 말하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키루 도호 구로사와아키라 시무라다케시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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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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