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는 개봉시기를 가리지 않고 관객들이 알아 준다지만 사실 영화에서도 장르별로 흥행에 더 유리한 개봉시기가 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연말에는 온 가족이 볼 수 있고 소소하게 웃을 수 있는 훈훈한 가족영화가 사랑을 많이 받고 해를 지나 발렌타인데이 시즌이 되면 연인 관객들을 공략한 멜로영화가 집중적으로 개봉한다. 많은 물량과 제작비를 쏟아 부은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여름 성수기에 잘 어울린다.

그리고 가만히 있자니 덥고 에어컨을 틀기엔 조금 이른 초여름 날씨에는 역시 보기만 해도 서늘해지는 공포 및 호러영화가 안성맞춤이다. 314만 관객으로 <곡성>(687만)에 이어 역대 호러영화 흥행 2위에 빛나는 <장화, 홍련>은 여름시즌이 시작될 무렵인 2003년6월에 개봉해 전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한국형 좀비물'의 전성기를 열었던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도 2016년7월에 개봉해 1156만 관객을 동원했다.

여름에 공포 및 호러영화가 먹히는 것은 할리우드도 마찬가지다. 북미에서는 지난달 29일(이하 한국시각) <콰이어트 플레이스:첫째날>이 개봉해 첫 주에만 세계적으로 98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에도 영국에서 만든 공포영화 한 편이 북미에서 6월에 개봉해 많은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트레인스포팅>으로 유명한 대니 보일 감독의 좀비 호러영화 <28일 후>였다.
 
 <28일 후>는 800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만들어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28일 후>는 800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만들어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 이십세기폭스필름코퍼레이션

 
<오펜하이머>로 전성기 맞은 연기파 배우

1976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킬리언 머피는 10살 때부터 악기를 연주하고 곡을 쓰며 음악에 재능을 보였고 학창시절에는 동생과 함께 록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다. 밴드활동 시절 음반계약 제의를 받기도 했던 머피는 법대에 진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1년 만에 그만두고 아마추어 극단에 들어가 연기를 공부했다. 그리고 몇 편의 장·단편영화에 출연하던 머피는 2002년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에서 주인공 짐 역에 발탁됐다.

머피는 <28일 후>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좀비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깨어난 택배배달원 짐 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 <28일 후> 출연을 계기로 할리우드에 진출해 여러 작품에 출연하던 머피는 2005년 자신의 영화인생에 큰 전환점을 주는 인물을 만났다. 바로 머피의 얼굴을 세계적으로 알린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와 머피의 대표작이 된 <오펜하이머>를 연출한 '천재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었다.

머피는 <배트맨 비긴즈>의 스케어크로우 역을 시작으로 <다크 나이트> 3부작과 <인셉션>까지 놀란 감독이 연출한 영화에 4편 연속 출연했다(<다크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카메오 출연). 머피는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 수상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대니 보일 감독의 신작 <선샤인>, 아만다 샤이프리드,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연기호흡을 맞춘 SF범죄액션<인타임> 등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한 동안 영화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머피는 2013년 영국드라마 <피키 브라인더스>에서 범죄조직 블라인더스 조직의 실질적인 두목 토마스 쉘비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피키 브라인더스>는 2013년부터 2022년까지 6개의 시즌에 걸쳐 방송됐고 시즌 6 이후의 내용은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다. 머피 역시 <피키 브라인더스>와 토마스 쉘비 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영화판 출연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할리우드에서 연기를 잘하는 배우로 꼽히면서도 상복이 없었던 머피는 지난해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를 통해 꽃을 활짝 피웠다. <오펜하이머>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머피는 엄청난 열연을 선보였고 <오펜하이머>는 9억7500만 달러의 흥행과 함께 아카데미 5개 부문을 휩쓸었다. 그리고 머피는 미국과 영국 아카데미, 그리고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휩쓸며 커리어 최고의 황금기를 열었다.

5가지의 엔딩이 있는 좀비 호러영화
 
 <28일 후>는 극장판 엔딩 외에도 감독판 3가지, 시나리오판 1가지를 더해 총 5가지 엔딩이 존재한다.

<28일 후>는 극장판 엔딩 외에도 감독판 3가지, 시나리오판 1가지를 더해 총 5가지 엔딩이 존재한다. ⓒ 이십세기폭스필름코퍼레이션

 
1994년 범죄스릴러 <쉘로우 그레이브>로 데뷔한 대니 보일 감독은 1996년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트레인스포팅>을 통해 스타감독으로 도약한 후 <인질>,<비치> 등을 차례로 연출했다. 이완 맥그리거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같은 젊은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며 청춘들의 방황을 다룬 영화를 많이 만들었던 보일 감독이기에 2002년에 선보인 좀비호러영화 <28일 후>는 관객들에게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800만 달러라는 많지 않은 제작비로 만든 <28일 후>는 35mm필름이 아닌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해 촬영했다. <28일 후>는 당시 디지털 카메라 성능의 한계 때문에 마치 1960~70년대 영화를 보는 것처럼 화질이 상당히 거친 편이다. 하지만 오히려 영화의 거친 화면이 좀비에게 잠식된 희망 없는 세상을 잘 표현해 줬다. 실제로 영화 라스트씬은 디지털 카메라가 아닌 필름으로 촬영해 좀비가 득실거렸던 세상과 대비되는 화면을 볼 수 있다.

병원에서 깨어나 셀레나(나오미 해리스 분)와 마크(노아 헌틀리 분)를 만난 짐(킬리언 머피 분)은 좀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오직 생존(Survival)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좀비에게 쫓기다 해나(메건 번즈 분)와 프랭크(브렌단 글리슨 분) 부녀와 함께 움직이게 된 짐은 끈끈한 부녀 사이를 보면서 생존이 아닌 삶(Life)을 생각하게 된다. 좀비가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짐이 인간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는 것도 <28일 후>의 중요한 감상포인트다.

<28일 후>는 타락한 군인과 좀비들 사이에서 탈출에 성공한 짐과 셀레나, 해나가 외딴 시골집에서 살다가 지나가는 비행기에게 구조신호를 보내면서 막을 내린다. 하지만 감독판에는 3가지 다른 버전의 엔딩이 있고 스토리보드 단계에서만 구상됐고 촬영은 하지 않았던 5번째 엔딩도 있었다. 극장판 오리지널 엔딩을 제외한 나머지 4개의 엔딩에서는 모두 총에 맞고 쓰러진 짐이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28일 후>는 개봉 후 5년이 지난 2007년 <28주 후>라는 제목의 속편이 개봉했다. '분노 바이러스'가 런던을 덮친 후 6개월이 지나 재건하고 있는 도시에서 더욱 위험한 형태의 바이러스가 나타나 도시를 초토화시킨다는 내용이다. 전편에 비해 스케일이 한층 커진 <28주 후>는 6500만 달러의 수익으로 흥행성적은 썩 나쁘지 않았지만 설정오류와 부족한 개연성 등으로 전편만큼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때론 냉철하고 때론 인간적인 히로인
 
 나오미 해리스는 <28일 후>에서 약사 출신의 강인한 생존자 셀레나를 연기했다.

나오미 해리스는 <28일 후>에서 약사 출신의 강인한 생존자 셀레나를 연기했다. ⓒ 이십세기폭스필름코퍼레이션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비롯해 <007 스펙터>, <007 노 타임 투 다이>, <램페이지>, <베놈2:렛 데어 비 카니지> 등 할리우드의 굵직한 작품에 많이 출연했던 나오미 해리스는 <28일 후>에서 약사 출신의 생존자 셀레나를 연기했다. 셀레나는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동료라 해도 그 즉시 숨을 끊어 버리는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다. 하지만 셀레나는 짐과 해나를 만난 후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지며 인간미를 되찾았다.

좀비의 시대가 오기 전 택시를 운전했던 프랭크는 처음 보는 짐과 셀레나에게 선뜻 거처를 내주고 술과 음식을 대접할 정도로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인물이다. 하지만 프랭크는 군인들이 있는 부대에 도착하기 직전 시체의 혈액이 눈에 들어가면서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감염된 직후 해나에게 마지막으로 사랑의 마음을 전한 프랭크는 이성이 남아있을 때 딸과 멀리 떨어지려 하는 애틋한 부정을 보이며 관객들을 안타깝게 했다.

영화 <식스티 세컨즈>와 <디 아더스>, 드라마 <닥터후>, <히어로즈> 등에 출연했던 크리스토퍼 에클스턴은 <28일 후>에서 영국의 육군장교 헨리 웨스트 소령 역을 맡았다. 웨스트 소령은 힘들게 부대를 찾아온 짐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하지만 사실 군인들의 진짜 목적은 나라재건을 명분으로 여자들을 모아 성노예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웨스트 소령은 영화 후반 해나의 노련한(?) 운전으로 차에서 떨어지면서 좀비의 먹잇감이 돼 최후를 맞는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28일후 대니보일감독 킬리언머피 나오미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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