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엔 중국의 기세에 다소 밀리고 있지만 200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바둑 최강국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기사는 '세계 바둑의 1인자'라고 불러도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실제로 한국은 1980년대를 호령했던 조훈현 9단부터 조훈현 9단의 제자로 '청출어람'을 몸소 실천했던 이창호 9단, AI 알파고를 이긴 유일한 인류로 더욱 유명한 이세돌 9단 등 세계 최고의 바둑기사 계보를 보유하고 있다. 

대중매체에서도 바둑이라는 소재가 종종 등장한다. 드라마 <미생>에서는 주인공 장그래(임시완 분)가 원 인터내셔널에 취직하기 전 직업이 바둑기사였고 <응답하라 1988>에서는 박보검이 이창호 9단을 모델로 한 천재바둑기사 최택을 연기했다. 2023년 큰 사랑을 받았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도 문동은(송혜교 분)이 박연진(임지연 분)의 남편 하도영(정성일 분)에게 접근하기 위해 쓴 수단이 바로 바둑이었다.

하지만 많은 분야가 그런 것처럼 바둑의 세계에서도 '음지'가 존재한다. 바둑경기에 많은 판돈이 오가고 때로는 폭력조직까지 연루되는 내기 바둑의 세계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지난 2014년 여름에는 내기 바둑과 여기에 연루돼 친형을 잃고 감옥에 가게 된 프로기사 출신 남자의 복수를 다룬 영화가 개봉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정우성과 안성기, 이범수, 이시영 등이 출연했던 조범구 감독의 <신의 한 수>였다.
 
 <신의 한 수>는 전국 356만 관객을 동원하며 2014년 여름 극장가의 포문을 열었다.

<신의 한 수>는 전국 356만 관객을 동원하며 2014년 여름 극장가의 포문을 열었다. ⓒ (주)쇼박스

 
로맨스-액션연기 모두 가능한 여성배우

대학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후 2008년 케이블 드라마를 통해 데뷔한 이시영은 2009년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구준표(이민호 분)를 짝사랑한 나머지 친구인 금잔디(구혜선 분)를 모함하는 오민지를 연기하면서 주목 받았다. 이후 <우리 결혼했어요>를 비롯한 여러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린 이시영은 2010년 드라마 <부자의 탄생>에서 부태희 역을 맡아 <꽃보다 남자>의 악녀 이미지를 씻었다.

2011년 <위험한 상견례>를 통해 영화 주연으로 데뷔한 이시영은 부산 진씨 집안의 막내딸 진다홍 역을 맡아 송새벽과 좋은 연기호흡을 보여주며 259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2013년 오정세와 함께 출연했던 이원석 감독의 <남자사용설명서> 역시 아쉬운 흥행성적(전국50만)과 별개로 영화의 재미와 이시영의 연기는 관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14년 상반기 드라마 <골든크로스>에 출연한 이시영은 그해 여름 바둑도박을 소재로 한 영화 <신의 한 수>에서 아시안게임 바둑 금메달리스트 출신으로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살수 패거리에 합류한 '배꼽' 권은정을 연기했다. <신의 한 수>는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바둑도박'이라는 신선한 소재와 흥미로운 전개, 그리고 배우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화려한 액션연기가 더해지면서 전국 356만 관객을 동원했다.

2010년부터 아마추어 복싱에 도전해 2013년 국가대표에 뽑히기도 이시영은 2016년 예능프로그램 <진짜 사나이>에 출연해 그해 MBC 연예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이시영은 당시 '군인들의 희생에 감사하다'는 의미의 수상소감을 남기며 관객들과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2017년 결혼 후 이듬해 1월 아들을 낳은 이시영은 2019년 액션영화 <언니>에 출연했지만 19만 관객에 그치며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시영은 같은 해 드라마 <왜 그래 풍상씨>에서 풍상씨 5남매의 넷째 이화상을 연기해 그해 KBS 연기대상 우수상을 수상했고 2020년 연말엔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에서 엄청난 액션 연기로 걸크러시 매력을 과시했다. 오는 7월 19일 공개예정인 <스위트홈> 시즌3에서도 서이경 역을 맡을 예정인 이시영은 오는 연말 넷플릭스 예능프로그램 <좀비버스>의 두 번째 시즌에 출연할 예정이다.

<타짜>와 닮은 듯 다른 바둑 소재 도박영화
 
 정우성(오른쪽)과 이범수의 카리스마 대결은 <신의 한 수>의 가장 큰 볼거리 중 하나다.

정우성(오른쪽)과 이범수의 카리스마 대결은 <신의 한 수>의 가장 큰 볼거리 중 하나다. ⓒ (주)쇼박스

 
'신의 한 수'는 바둑에서 승부를 내는 결정적인 한 수를 의미하는 말로 일본만화 <히카루의 바둑>에서 처음 등장했다. 물론 바둑계에서는 일찌감치 널리 쓰였던 표현이었고 현실에서도 쓰는 사람이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4번째 대국에서 이세돌 9단이 둔 78번째 수를 중국기사 구리 9단이 '신지일수'라고 표현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명해졌다('신의 한 수'는 150만 구독자를 보유한 보수 유튜브 채널의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 <신의 한 수>는 바둑영화를 표방하고 있고 영화에서도 바둑장면이 꽤 많이 나온다. 하지만 <신의 한 수>가 그저 '바둑 마니아'들을 위한 영화라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신의 한 수>는 내기 바둑을 통해 친형과 한쪽 눈을 잃은 주인공 송태석(정우성 분)이 자신의 원수인 살수(이범수 분)에게 복수하는 내용의 영화다. 바둑만큼 다른 볼거리도 충분하기 때문에 바둑을 전혀 모르는 관객이라도 영화를 감상하기엔 크게 지장이 없다.

내기 바둑을 소재로 하는 <신의 한 수>는 '도박영화의 바이블'이 된 최동훈 감독의 <타짜>와 유사한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때마다 거친 글씨체로 화면 한 쪽에 소제목이 뜨는 연출은 <타짜>에서 나오는 장면을 그대로 오마주했다. 복수에 혈안이 된 주인공을 중심으로 말 많고 관객들에게 쉬어 갈 시간을 제공하는 조력자, 스승 또는 멘토 역할을 하는 은둔고수 같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타짜>와의 공통점이다. 

정우성은 200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마다 기복이 심한 대표적인 배우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정우성은 2008년 <놈놈놈>을 기점으로 배우로서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갖추기 시작했고 2010년대 중반부터 <감시자들>과 <아수라> <더 킹> <강철비> <증인>처럼 흥행에도 성공하고 연기로도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들을 차례로 만나기 시작했다. <신의 한 수>는 배우로서 정우성의 전성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56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한 <신의 한 수>는 5년이 지난 2019년 속편 <신의 한 수 : 귀수편>이 개봉했다. 1편에서 잠시 언급됐던 귀수(권상우 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신의 한 수 : 귀수편>은 김희원, 김성균, 허성태 등 연기파 배우들과 떠오르는 신예 우도환까지 출연해 전국 215만 관객을 동원했다. 다만 <신의 한 수: 귀수편>은 <신의 한 수>의 속편을 표방하면서도 배우가 전면 교체돼 관객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다.

'주님', '지자쓰'로 불리는 맹인 바둑기사
 
 '국민배우' 안성기는 <신의 한 수>에서 맹인 바둑기사를 연기하며 영화에 무게감을 더했다.

'국민배우' 안성기는 <신의 한 수>에서 맹인 바둑기사를 연기하며 영화에 무게감을 더했다. ⓒ (주)쇼박스

 
2019년부터 혈액암으로 투병을 했던 '국민배우' 안성기는 <신의 한 수>에서 '주님'으로 불리는 맹인 바둑기사를 연기했다. 주님은 맹인용 바둑판을 깔고 거리에서 노인들과 소주내기 바둑을 두다가 송태석을 만나 일행에 합류한다. 상대의 바둑스타일을 보고 상대를 파악하는 데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주님은 중국에서 온 바둑신동의 도움을 받은 살수에게 패하고 살수의 칼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세상을 떠난다.

류승완 감독의 <짝패>에서 처세에 능한 악역 장필호를 연기했던 이범수는 <신의 한 수>에서 태석 형제의 원수이자 영화의 최종보스 살수 역을 맡았다. 살수는 바둑실력은 크게 내세울 수준이 못되지만 초반 칼을 휘두르는 중국 조직원 10여 명을 단신으로 무찌를 정도로 뛰어난 무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엄청난 전투력과 카리스마를 뽐내던 살수는 영화 막판 주님의 칼을 들고 싸운 태석에 의해 똑같이 당하면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김인권이 연기한 꽁수는 태석의 일행들 중 유일하게 살수에게 뚜렷한 원한이 없지만 계획에 성공하면 30억을 준다는 태석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리면서 일행에 합류한다. 김인권이 여러 작품에서 연기했던 캐릭터들처럼 <신의 한 수>의 꽁수 역시 영화의 '쉼표' 역할을 하는 개그캐릭터다. 하지만 가벼운 모습과 달리 주님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고 자신이 큰 부상을 당했을 때도 태석에게 도망가라고 할 정도로 의리 있는 인물이다.

2017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던 봉준호 감독의 <옥자>에서 미자를 연기했던 안서현은 <신의 한 수>에서 중국에서 온 바둑신동 량량을 연기했다. 아직 엄마 품이 어울릴 법한 어린 소녀가 주님 같은 쟁쟁한 바둑고수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는 영화 속 설정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이창호 9단이나 이세돌 9단 역시 10대의 어린 나이에 노련한 기사들을 꺾고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신의한수 조범구감독 이시영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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