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프라임>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 3부의 한 장면.

EBS <다큐프라임>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 3부의 한 장면. ⓒ EBS


☞ [이전 기사] 여기, "집에서 죽겠습니다"라는 사람들이 있다 

안윤미씨의 어머님은 네 차례에 걸쳐 암투병을 거치셨다. 그 과정에서 탈수와 섬망 증세를 겪으며 위기를 맞았다. 불가피하게 모시게 된 요양원, 하지만 어머니는 매번 집에 가고 싶다 하셨다. 심지어, 섬망 상태에서 집에 갈 수 있겠지 하며 창문을 열고 탈출하려고도 하셨다. 결국 윤미씨는 어머니를 집으로 모셨다. 

그토록 그리던 집, 그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햇반을 데워 김에 싸서 밥 한 술을 뜨시고 당신이 좋아하던 보들보들한 이부자리가 있는 침대에 들었다. 그리고 TV를 켰다. 그게 다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말하신다.

"내 집이 너무 좋더라."
 
무슨 차이였을까. 말 끝마다 '어르신' 하고 부르는 소리가 다 듣기 싫었다던 어머니, 답답해서 거실로 나가도, '어르신, 들어가세요' 하던, 도무지 내 맘대로 할 수 없던 그 환경이 너무도 싫으셨단다. 독립적인 나만의 공간에 대한 절실함이 크셨던 어머니는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집을 택했다. 대신, 홈캠으로 딸이 자신을 지켜보는 걸 양보했다. '엄마, 약 먹을 시간이야', 딸의 참견을 받아들이는 대신 나의 일상을 지켜내는 중이다. 

돌봄의 주체는 '노인'이다 
 
 EBS <다큐프라임>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 3부의 한 장면.

EBS <다큐프라임>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 3부의 한 장면. ⓒ EBS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는 요양원과 요양병원, 노년의 마지막 집은 대부분 이곳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 그런 흐름에서 다큐는 묻는다. 과연, 그 마지막 집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지켜지고 있는가를. 대부분 요양원이나 요양 병원으로 가는 건 가족이나, 의료진의 결정에 따라서이다. 그리고 그곳의 일상은 '의료적 편의나 서비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즉 몸이 아프더라도 그 '시설'에 살고 있는 건 노인인데, 그들이 시설의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3부의 제목인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은 미국의 계관 시인 도널드 홀이 쓴 에세이의 제목과 동일하다. 미국 전역을 돌며 자신의 시를 대중에게 알려주던 시인도 늙음 앞에서는 무력하다. 그는 말한다. 늙음이란 자신의 세상이, 공간이 점점 더 축소되어 가는 것이라고. 전미를 누비던 시인은 이제 자신의 낡은 소파에 앉아 하루종일 창밖을 바라보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 에세이에서 그렇게 자신의 세계가 축소되어 가던 도널드 홀이 황망해 하던 순간이 나온다. 바로 다치는 바람에 건너 마을에 가서 만나던 애인을 더는 스스로 만나러 갈 수 없게 된 순간이다. 

우리네 말로, '다 늙은 노인네가 주책'일까? 요양원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지막을 글로 남기고 있는 조명자씨는 회고한다. 자신의 어머니가 70대가 되어도 옷을 사시려 했을 때, 돌아가실 노인이 그 비싸고 예쁜 옷을 왜 사고 싶을까 했단다. 그렇게 생각하던 딸 자신이 70이 되어보니 그녀 역시 옷이 사고 싶단다. 70이 되면 새 옷을 사는 것도 부끄러워해야 할 나이, 그렇다면 80은? 90은?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께 명자씨가 어떠냐고 묻자 '감옥같은데 좋긴 뭐가 좋냐!'며 어머님이 버럭 화를 내셨다. 

아무리 잘 가꾼 잔디밭도 환자 스스로는 갈 수 없는 곳, 철침대가 노인분에게 허용된 유일한 공간, 이것이 오늘날 우리 요양원의 현실이 아닐까. 의료인류학자 송병기씨는 바로 여기서 질문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휴일의 늦잠, 산책, 그리고 먹고 싶을 때 시켜먹을 수 있는 치킨, 이런 것들이 허용되지 않는 마지막 집의 삶이 과연 맞는 건가?

'노년의 목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
 
 EBS <다큐프라임>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 3부의 한 장면.

EBS <다큐프라임>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 3부의 한 장면. ⓒ EBS

 
여기 임종을 사흘 앞둔 노인이 한 분 계신다. 곁에서 간호를 하는 사람들이 담배에 불을 붙여 환자의 입에 물린다. 혼자서는 담배를 들 힘도 없지만, 도움을 받아 노인은 몇 모금 담배를 핀다. 

이 충격적인 장면, 지금 우리의 '요양 치료'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일본 지바현 긴모쿠세이 요양원에서는 '숨이 멎기 직전까지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노인의 소망을 받아들인다. 그분다운 마지막 희망 사항을 존중한 것이다. 

'특별 노인 요양홈'인 이곳은 집에서는 혼자 생활 할 수 없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노인 본인이 삶의 중심이 되어 살아가도록 돕는 곳이다. 이곳의 철칙은 할 수 없는 것만 도와드리자는 것이다. 하루의 시작, 노인은 힘겹지만 스스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돕는 대신, 곁에서 '힘내세요!'라고 말할 뿐, 물론 쉽지 않다. 도와주면 5분이면 끝날 것들이 하세월이니 말이다.

식사 시간도 2시간이다. 살아온 방식, 몸의 상태에 따라 저마다 먹는 속도도, 먹어야 하는 음식도 다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한 시간이다. '스스로 먹기를 선택했다면 속도는 문제가 아니'란다. 느린 것이 아니라, 나다운 것이 중요하다고. 우리 사회에서 늙으면 '아기'가 된다며 돌봄을 당연시 여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대응 방식이다. 

치매를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 '집에 간다'고 나서는 노인, 요양원 사람들은 '조심히 가세요'라고 인사한다. 그냥 보내는 것? 아니 몰래 따라나선다. 그러면 대부분 노인들은 5분도 안 돼 길을 잃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려 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그러면 그때 다가가 '무슨 일이세요?', '차 한잔 하실래요?'라며 노인을 모시고 온단다. 대부분 노인들은 '좋아요' 하고 흔쾌히 돌아온다니. 
 
물론 일본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다. 배설물과 욕창 냄새가 물씬 나던 요양원, 거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억제대까지 채워 놓았었다. 그러던 것이 다나카 토모에가 앞장 서서 '노인에게 자유와 긍지와 평화를'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노인의 삶도 인간다워야함을 주장하며 신체를 억제하지 않기로 했다. 

미국인 캐런 브라운 윌슨도 마찬가지다. 원할 때 침대에 눕고, 원하는 걸 먹고 싶다던 어머니를 위한 요양원을 만들고자 했다. 의존해야 하는 시기가 와도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어시스턴트 리빙'을 지향하는 미시간 주의 윌로우 플레이스가 그곳이다. 이곳에 신규 입소자들은 '언제 도움을 원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걸 함께 해주는 '리스크 협상'을 해나가며 노년의 삶을 유지해나간다. 

노년의 돌봄은 매번 시설이냐 집이냐 하는 식으로 '장소'의 문제로 치환되어버리곤 한다. 2023년 기준 노령화 지수 163.4(아이들 100명에 노인 163명)의 사회가 된 대한민국, 치료 중심의 돌봄을 넘어서, 비록 의존적인 상태이고, 아파도, 나의 목소리와 내 삶의 서사가 존중받을 수 있는 노년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다큐는 주장한다. 
   
 EBS <다큐프라임>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 3부의 한 장면.

EBS <다큐프라임>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 3부의 한 장면. ⓒ 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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