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장르에서 오래 활동했던 배우들은 관객들에게 익숙한 '직업군'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출연하는 영화마다 현란한 액션연기를 선보이는 성룡의 경우엔 경찰이나 모험가 같은 캐릭터가 잘 어울린다.

하지만 1999년에 개봉했던 이 영화에서 성룡은 관객들이 알고 있는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캐릭터를 연기했다. 성룡이 주연과 제작, 각본에 참여하며 성공한 홍콩의 부호를 연기했던 영화 <성룡의 빅타임>이었다.
 
 <성룡의 빅타임>은 <쉬리>와 같은 날 개봉해 서울에서만 13만 관객을 동원했다.

<성룡의 빅타임>은 <쉬리>와 같은 날 개봉해 서울에서만 13만 관객을 동원했다. ⓒ (주)동아수출공사

 
성인배우에서 3대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성장

1976년 대만에서 태어난 서기는 시간제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모델로 활동하던 서기의 잠재력을 발견한 홍콩의 유명 영화감독 왕정은 서기를 발탁해 영화배우로 데뷔시켰다. 하지만 서기는 데뷔 초 <홍등구>와 <옥보단2:옥녀심경>,<철매>처럼 노출수위가 높은 성인영화 위주로 출연했다. 그렇게 성인배우의 이미지가 굳어지던 서기는 고 장국영, 막문위와 함께 영화 <색정남녀>에 출연해 1997년 홍콩 금상장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과 신인여우상을 휩쓸면서 연기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색정남녀> 이후 노출이 있는 영화에 거의 출연하지 않은 서기는 1998년 여명과 <유리의 성>에 출연했고 1999년에는 성룡이 주연을 맡고 제작과 각본에도 참여한 액션멜로 <성룡의 빅타임>에 출연했다. <성룡의 빅타임>에서 대만의 작은 바다마을에 사는 귀여운 소녀 아부를 연기한 서기는 순수한 매력으로 관객들을 사로 잡았다. 실제로 <유리의 성>과 <성룡의 빅타임>은 성인배우였던 서기의 이미지를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서기는 2000년 허우샤오센 감독의 <밀레니엄 맘보>에 출연해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서기는 칸 영화제에서 <밀레니엄 맘보>가 호평을 받은 후 너무 기쁜 나머지 호텔로 돌아가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2005년에도 칸 영화제에 초청 받은 영화 <쓰리 타임즈>에 출연한 서기는 2006년 한국영화 <조폭마누라3>에 출연했지만 169만 관객으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2010년대에도 대만과 홍콩을 넘나들며 활동을 이어가던 서기는 2015년 허우샤우센 감독과 호흡을 맞춘 <자객 섭은낭>에 출연했고 <자객 섭은낭>은 2015년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2016년 배우 겸 감독 풍덕륜과 결혼한 서기는 작년 베니스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선정되면서 공리, 장만옥에 이어 중화권 배우로는 3번째로 세계 3대 영화제(2008년 베를린, 2009년 칸, 2023년 베니스)의 심사위원에 모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액션과 모험 줄이고 '멜로감성'으로 채웠다
 
 <성룡의 빅타임>은 액션보다는 서기(왼쪽)와 성룡의 멜로가 상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성룡의 빅타임>은 액션보다는 서기(왼쪽)와 성룡의 멜로가 상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 (주)동아수출공사

 
한국이 IMF 경제위기로 큰 어려움을 겪었던 세기말, 성룡은 할리우드 영화 <러시아워>에 출연해 2억4400만 달러의 흥행을 견인하면서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스타로 도약하고 있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러시아워> 속편을 비롯, 성룡의 할리우드 활동이 밀려 있었지만 자신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 준 홍콩 시장을 외면할 수 없었고 1999년 <성룡의 빅타임>을 제작했다.

성룡은 <취권>을 시작으로 주인공으로 출연한 대부분의 영화에서 언제나 스토리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성룡의 빅타임>은 성룡이 출연한 영화 중 이례적으로 성룡이 아닌 서기가 맡은 대만의 바다마을 소녀 아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성룡의 빅타임> 개봉 당시 서기가 아직 아시아에서는 물론이고 홍콩에서도 엄청난 스타배우가 아니었음을 고려하면 대단히 파격적인 대우였던 셈이다.

<성룡의 빅타임>은 할리우드에 진출한 성룡이 중화권 및 아시아 관객들을 위한 '선물'의 성격이 강했고 이 때문에 스토리도 기존 성룡 영화들에 비해 가볍게 진행된다. 하지만 <성룡의 빅타임>은 여전한 성룡의 높은 지명도와 <유리의 성>을 통해 부쩍 인지도를 올린 서기의 유쾌한 연기호흡으로 서울에서만 13만 관객을 동원했다. 같은 날 개봉한 영화가 당시 한국영화 최다관객 기록을 세운 <쉬리>였음을 고려하면 상당히 선전한 셈이다.

<성룡의 빅타임>이 다른 성룡 영화와 구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빌런'이 없었다는 점이다. 성룡과 두 차례 1:1 대결을 벌이는 호주의 무술고수 알란(브래드 제임스 앨런 분)은 싸우는 내내 진자오를 존중했고 사업가로서 진자오의 라이벌인 노내화도 알고 보니 어린 시절부터 진자오와 친구였다. 짝사랑하는 아부를 찾아 홍콩까지 찾아오는 용일(임현제 분) 역시 사랑의 연적이 되기는커녕 개그캐릭터로서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다.

<성룡의 빅타임>을 연출한 곡덕소 감독은 1990년대 초반부터 홍콩에서 배우 겸 각본가로 활동했다. 특히 <파괴지왕>과 <당백호점추향>,<식신> 등에 출연했던 대표적인 '주성치 사단' 배우 중 한 명이었다. 1995년 <보로배수>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한 곡덕소는 1999년 <성룡의 빅타임>을 연출했고 <행운초인>,<용감위>,<가유희사2009>,<신기협려>,<007북경특급2> 등을 만들며 배우 겸 감독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유쾌한 성소수자 연기한 중화권 최고배우
 
 <성룡의 빅타임>에서 양조위의 진중한 연기를 기대하면 실망이 꽤 클 수도 있다.

<성룡의 빅타임>에서 양조위의 진중한 연기를 기대하면 실망이 꽤 클 수도 있다. ⓒ (주)동아수출공사

 
<성룡의 빅타임>을 보면 뜻밖의 인물이 예상을 뛰어넘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바로 역대 홍콩 금상장영화제 8회수상(주연상 6회, 조연상2회)에 빛나는 중화권 최고의 배우 양조위다. 양조위는 <성룡의 빅타임>에서 아부가 바다에서 발견하는 유리병을 홍콩에서 띄워 보낸 알버트를 연기했다. 문제는 아부가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하고 찾아간 알버트가 성소수자였다는 점이다.

1990년대 홍콩영화에서는 성소수자를 코믹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양조위 역시 평소 가지고 있는 진중한 이미지는 전혀 찾을 수 없는 가벼운 연기로 알버트를 표현했다.

<성룡의 빅타임>에는 주성치가 경찰 역할로 카메오 출연했다. 주성치는 당시 성룡과 '카메오 트레이드'를 성사시켜 주성치가 <성룡의 빅타임>에, 성룡이 <희극지왕>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성룡 영화의 빠질 수 없는 재미 중 하나인 NG장면을 보면 주성치의 진지한 코믹연기에 서기와 성룡이 웃음이 터지면서 NG가 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주성치는 NG가 난 후에도 끝까지 자신의 대사를 마치고 개에게 끌려 가는 연기까지 진지하게(?) 마무리했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성룡의빅타임 곡덕소감독 서기 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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