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스틸 이미지
찬란
사진작가로서의 성공과 명성을 획득하긴 했지만, 그의 정체성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속한 공동체 그룹에 거대한 재앙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바로 후천성면역결핍증, AIDS라는 신종 질병의 창궐이다. 성적 소수자가 태반이던 지인 중 상당수가 이 전대미문의 질병에 노출되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지만, 문제는 주류 사회가 이 신종 질병에 대처하기 위해 공공의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으로 희생양을 만들려 했다는 점이다. 마침 미국 대통령은 신보수주의(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기치를 내걸고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이었고, 극우 개신교 구미에 맞게 정책을 펼치던 시절이다. 지금도 악명높은 미국의 선별적 의료보험 체계 아래에서 낸 골딘의 지인 상당수가 제대로 된 공공의료 보호막 바깥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실제 보건의료적 판단보다는 개인의 성적 일탈이나 방종으로 인한 '천벌'처럼 에이즈를 다루면서 그 희생은 고스란히 성적 소수자들에게 전가되었고, 극우세력의 캠페인은 이들을 음지로 내몰아 고립시켰다. 낸 골딘은 친우들의 때 이른 죽음을 연거푸 겪으며 비애와 분노를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에이즈의 확산과 성 소수자에 대한 정치적 공격은 사회적 의제로 자연스레 대두되었고, 낸 골딘과 동료들은 정치 캠페인을 펼치며 저항했다. 영화 속 일갈처럼 예술과 섹스와 정치는 구분될 수 없었다. 해당 시기에 마돈나 같은 팝 음악 아이콘들 또한 극 보수화되어가던 당대 미국 사회 내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총동원해 마이너리티와 하위문화 집단을 보호하려 애썼고, 이는 '성정치'로 국내에도 소개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 낸 골딘의 좌절과 저항은 영화 속에서도 비중 있게 소개되지만, 차마 지켜보기 힘들 정도의 좌절과 억제할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사회적 살인'이라 해도 무방할 당시 미국 주류의 의도적 외면과 책임 전가를 위한 공세는 얼마 후 미국을 추종하던 한국사회 보수진영에서도 판박이로 도입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퀴어 페스티발 때마다 벌어지는 반대진영의 주장은 지금 현재도 그 시절 미국 보수 개신교단 캠페인과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다. 세속적 성공과는 별개로 그렇게 1980년대의 광풍은 주인공에게 거대한 상처로 남았고, 본인 역시 이 시기 개인사로 인해 약물에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약물중독에서 재활하기 위해 낸 골딘은 의료진의 도움으로 지난한 치료에 돌입한다. 우리 통념처럼 약물중독은 대번에 어디 감금해서 중단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적절한 시기별 과정을 통해 의존성을 줄여나가는 배려가 핵심이다. 그런데 그가 약물 의존도를 줄이면서 중독 금단현상을 최소한도로 억제하기 위해 복용하던 처방전이 새로운 문제가 되어버렸다. 당시 낸 골딘을 포함해 미국 내 약물중독 재활을 시도하던 이들이 가장 흔하게 처방을 받던 약은 바로 제약회사 '퍼듀'가 내놓은 마약성분 함유 진통제 '옥시콘틴'이다. 그런데 이 진통제는 중독증세를 줄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중독을 부추기는 부작용을 지녔다. 하지만 이윤에 눈이 먼 거대 제약회사는 그 중독성을 축소하는 선전으로 은폐해버렸다. 그 결과 추산 50만 명 이상이 부작용으로 미국 내에서만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된다.
끔찍한 1980년대 에이즈의 기억을 가진 낸 골딘으로선 이런 모럴 해저드와 공공의 방기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차원의 사회적 범죄행위였다. 그는 명망 있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그리고 주변에서도 도시락 싸서 만류할 싸움에서 선봉에 선다. 사법기관과 미디어의 비호를 받는 거대 자본과의 투쟁에서 세계적 명성을 지닌 작가의 위상이 방패가 되어줄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표 자격으로 낸 골딘은 'P.A.I.N.'의 주요 활동에 참여해 골리앗과의 투쟁을 지속한다. 아카데미상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에 빛나는 <시티즌 포> 등으로 사회고발 성격 기록영화의 장인으로 공인된 로라 포이트라스 감독을 찾아가 자신들의 싸움을 기록해 달라고 제안한 것도 낸 골딘 본인이었다.
그렇게 원활한 연결을 통해 'P.A.I.N.'의 주요 투쟁은 고스란히 영화 속에 담겨진다. 이는 현대미술이 갖는 상업주의 의혹과도 직결되는데, 거대 제약자본이 이미지 세탁을 위해 미술관과 박물관에 막대한 기부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메트로폴리탄, 루브르, 테이트, 구겐하임 같은 누구나 한 번 쯤 방문하길 선망하는 세계적 명성의 예술 전시장에는 어김없이 퍼듀 제약회사를 소유한 거대 가문의 후원증서와 가문의 이름을 딴 시설이 존재했다. 낸 골딘은 사회적 평판과 함께 자신이 가동할 수 있는 힘-해당 가문의 기부와 함께 자신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는-을 깨닫고 도깨비 방망이처럼 휘두르기 시작한다. 감독의 전작들에서 소름돋던 순간들처럼 거대 자본은 단체 주요 활동가들을 감시하고 회유와 협박을 진행하지만, 본인 혹은 소중한 이들을 잃어버린 대상자들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세계 유수의 예술기관 내에서 게릴라 전투처럼 낸 골딘과 동지들의 기습 시위와 저항이 이어진다. 그런 투쟁은 낸 골딘에겐 과외활동이 아니라 자신 역시 그 안의 일부가 되어버린 현대 예술의 상업주의와의 영합에 대한 내부 저항 자체였을 법하다.
고도로 계산된 공적 환기와 예술가 사적 기억의 융합
▲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스틸 이미지
찬란
영화는 그런 굵직한 줄기들을 솜씨 좋게 조합해 2시간을 팽팽하게 질주한다. 총 6개 챕터로 구분된 이야기는 각각 고유의 서사 전개를 담당하며 거의 한 순간도 느슨해지길 거부한다.
<1> 무자비한 논리
: 라이브 인터뷰를 통해 낸 골딘의 어릴 적 내밀한 이야기와 언니의 불운한 최후를 풀어내는 사적인 영역 위주 구성
<2> 자산
: 억압적 가정에서 생존을 위해 탈출한 뒤 방황하던 낸 골딘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포용해줄 동료들을 만나고 사진으로 언어를 대신하게 되는 과정
<3> 발라드
: 불안정 속의 균형을 마침내 찾은 낸 골딘이 자신이 그 일원인 마이너리티 공동체를 기록하는 작업에서 한 순환을 획득하는 과정과 이후의 거침없는 행보 소개
<4> 우리의 사라짐에 저항하며
: 에이즈 도래와 사회적 억압에 맞서는 생존투쟁의 격렬한 분위기 해설
<5> 도피 수단
: 본인과 주변의 비운에 지친 낸 골딘이 약물중독에 빠지고 재활하기 위한 필사의 투쟁,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정된 운명처럼 시작된 ''P.A.I.N.' 활동
<6> 자매
: 현대예술의 진정성과 공익적 책무가 결합된 투쟁의 승리와 그 과정에서 얻은 가족들, 그리고 오랜 유년기의 트라우마 극복 과정
그렇게 영화는 장구한 시간과 과정을 거치며 지극히 개인적인 가정사에서 출발해 자신이 안식을 누릴 공동체를 찾아내고,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사진을 배워 일가를 이룬 주인공이 친우들의 비극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전심전력으로 세상과 싸우며 마침내 두려웠던 자신과 가족의 과거와 대면하는 일대기를 완성한다. 예술가를 소개하는 기록영화에서 그가 얼마나 대단하며 그의 작업이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가 웅변하는 전형성과는 달리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지독히 개인적인 게 결국 정치적이라는 오래된 정치운동 테제를 구현하는 데 총력을 집중하고 그에 걸맞은 완결을 선보이기에 이른다.
낸 골딘이라는 사진가가 가진 독보적 면모와 다면성은 논쟁적 인물과 사회모순을 담는 데 정평이 난 로라 포이트라스에 의해 제대로 극적 완성도를 뽑아냈다. 평소 낸 골딘의 사진을 접해온 이들이라면, 혹은 <시티즌 포> 이후 감독의 신작을 기다렸다면 양자를 공히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긴장감과 후련함을 겸비한 작업이다. 하지만 낸 골딘의 방대한 작업 중 특히 그의 첫 작업이자 대표작이라 할 '발라드' 시리즈에 집중된 소개란 점은 언급하고 싶다. 작가의 사진 세계는 20세기 후반부터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이미지 외에 확장과 실험을 거듭해 나가는 중이기에, 이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사진 이미지만으로 낸 골딘이라는 사진계의 거목을 소화했다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다. 영화가 집중한 주제 때문에 낸 골딘의 반골적 기질과 정체성이 극명하게 구현된 초-중기 사진 위주로 공개된 것은 합리적 구성이기도 하다.
아울러 영화 속에서 낸 골딘의 현재 모습, 사회참여 면모에 주목한 이들이라면 8부작 미니시리즈 <돕식: 약물의 늪 Dopesick>(2021) 속에 상세하게 묘사된 옥시콘틴 사태를 참조하면 좋을 법하다. 이 다큐멘터리 속에서도 충분히 절절하게 잘 해설되고 있지만 실제로 얼마나 거대한 재앙적 사건인지 체감하고 싶다면 말이다. 두 시간 동안의 다큐멘터리는 비록 낸 골딘이라는 현대 사진의 거장이 구현한 장대한 경력도,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회적 타살 쟁점에 대한 이해도 100% 구현하기엔 조금 모자랄지 몰라도, 너무나 충실한 태도로 양립하기 쉽잖은 구성요소를 조화롭게 풀어낸다. 무엇보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우리가 간혹 접하게 되는 현대 예술에 품게 마련인 근본적 의문을 정면으로 다루는 데 의의가 크다. 그런 질문들을 온전히 해소해 주진 않을지언정 그에 대한 모순을 한 예술가의 굴곡 많은 삶과 투쟁을 통해 제기하는 데엔 명확히 한 획을 그었다. 확실히 요즘 범람하는 예술가 자랑 영화들과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작품정보> |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All the Beauty and the Bloodshed
2024│미국│다큐멘터리
2024.05.15. 개봉│122분│15세 관람가
연출 로라 포이트라스
출연 낸 골딘
수입/배급 찬란
공동배급 ㈜하이스트레인저
공동제공 소지섭, 51k
2022 79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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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