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시사직격> '지옥에서 살아남은 소년들 - 영화숙과 재생원의 기억' 편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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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존재했던 영화숙과 재생원은 같은 재단에서 운영하면서 운동장 하나 사이를 두고 인접했던 민간인 수용시설이었다. 영화숙은 1956년 재단법인 허가를 받으며 설립됐다. 부산시는 1962년 재단법인 영화숙에서 부랑인 수용시설 재생원 운영을 위탁했고 시에서 보조금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형태였다. 영화숙과 재생원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규모를 키우기 시작했다.
수용 규모는 영화숙과 재생원을 합쳐 1200명에 이르렀고, 성인에서 아이까지 아우르는 부산의 대표적인 복지시설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번듯한 겉모습과 달리 그 안에서 수용자들의 실상은 참혹했다.
이제 대부분 노인이 된 생존 피해자들은 50여 년 전 어린 시절 아무 것도 모르고 영화숙-재생원에 끌려가 당했던 끔찍했던 순간들을 생생하게 회상했다. 가해자들은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나 가난한 아이들, 갈 곳 없는 부랑자들을 납치하여 구타와 각종 가혹행위를 일삼고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심각한 폭행으로 사망한 이들도 속출했다. 생존 피해자들은 "급소를 맞아서 죽은 사람도 있고, 맞고 넘어지면서 뇌진탕으로 죽은 사람도 있다. 이미 숨이 끊어졌는 데도 꾀병을 부린다면서 죽은 사람을 두드려패기도 했다"고 말했다.
수용시설은 직원부터 원생들까지 소대장-반장-일반 아동으로 계급이 철저히 나뉘어 있었다. 같은 원생이라도 간부급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힘없는 일반 아동들은 몸을 더 밀착해야했다. 작은 몸부림을 치거나 공간을 넘어가면 가차없는 폭행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동성간 성폭행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생존 피해자 손석주씨는 눈물을 쏟으며 "그게 특별한 일이 아니고 거기서는 비일비일비재했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원생들은 자신과 같은 또다른 피해자들을 수집하는 역할에 동원되기도 했다. 일반인들에게는 '단속', 원생들 사이에서는 '달러간다'는 은어로 통용되었는데 사실상 '인간 사냥'이었다. 영화숙과 재생원에서는 하루 50명의 할당량을 부과하고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구타와 가혹행위가 쏟아졌다. 원생들은 비슷한 처지에 있던 고아나 가출소년, 소매치기 아이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부모가 있는 아이들을 납치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 생존 피해자들은 "부모의 손을 잡고 가는 아이의 뒤를 따라가며 '제발 손만 놔라. 그 손을 놓는 순간 너는 행복 끝, 불행 시작'이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사망자가 발생하면 시신을 처리하는 것도 같은 원생들의 역할이었다. 원생들은 어제까지 친구였던 아이들의 시신을 지게에 지거나 끈에 묶고 산으로 올라가 묻어야했다. 하루에 사망자가 여러 명 발생하면 수레를 동원하기도 했다. 생존 피해자 조상철(가명)씨는 "지금이라면 내가 그걸 왜 지고 갔을까 하겠지만, 그때는 무서운 줄도 몰랐다. 내가 안 하면 맞으니까. 그때는 그게 죄인 줄도 몰랐다.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참혹했던 시간을 회상했다. 현재 영화숙-재생원 건물은 사라졌지만 당시 수용시설에서 사망한 다수 원생들의 유해는 뒷산에 그대로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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