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시사직격> '지옥에서 살아남은 소년들 - 영화숙과 재생원의 기억' 편의 한 장면

KBS 1TV <시사직격> '지옥에서 살아남은 소년들 - 영화숙과 재생원의 기억' 편의 한 장면 ⓒ KBS


1970~1980년대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민간인 수용시설이었던 형제복지원에서는 이른바 부랑자나 고아로 불리우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납치, 인권유린, 노동착취, 학살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본질은 개인이나 특정 단체를 넘어선 시 당국과 정권의 비호를 등에 업고 이루어진 '국가적 폭력'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전쟁범죄의 대명사인 나치나 일제, 소련의 강제수용소에 버금가는 '한국판 아우슈비츠'라고 불렸을 만큼 더 씁쓸하고 가슴아픈 사건이었다.
 
그런데 당시 죄없는 민간인을 보호시설이라는 명목으로 형사 절차도 없이 가두고 인권유린을 자행한 시설은, 형제복지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형제복지원이 있었던 부산시에는 오히려 그보다 앞서서 또다른 민간인 수용시설인 '영화숙'과 '재생원'이 존재했다. 지난 3월 31일 방송된 KBS 1TV <시사 직격>에서는 '지옥에서 살아남은 소년들-영화숙과 재생원의 기억' 편을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또다른 국가폭력의 실태를 고발했다.
 
민간인 수용시설, 영화숙-재생원에서 벌어진 폭력
 
 KBS 1TV <시사직격> '지옥에서 살아남은 소년들 - 영화숙과 재생원의 기억' 편의 한 장면

KBS 1TV <시사직격> '지옥에서 살아남은 소년들 - 영화숙과 재생원의 기억' 편의 한 장면 ⓒ KBS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존재했던 영화숙과 재생원은 같은 재단에서 운영하면서 운동장 하나 사이를 두고 인접했던 민간인 수용시설이었다. 영화숙은 1956년 재단법인 허가를 받으며 설립됐다. 부산시는 1962년 재단법인 영화숙에서 부랑인 수용시설 재생원 운영을 위탁했고 시에서 보조금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형태였다. 영화숙과 재생원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규모를 키우기 시작했다.
 
수용 규모는 영화숙과 재생원을 합쳐 1200명에 이르렀고, 성인에서 아이까지 아우르는 부산의 대표적인 복지시설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번듯한 겉모습과 달리 그 안에서 수용자들의 실상은 참혹했다.
 
이제 대부분 노인이 된 생존 피해자들은 50여 년 전 어린 시절 아무 것도 모르고 영화숙-재생원에 끌려가 당했던 끔찍했던 순간들을 생생하게 회상했다. 가해자들은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나 가난한 아이들, 갈 곳 없는 부랑자들을 납치하여 구타와 각종 가혹행위를 일삼고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심각한 폭행으로 사망한 이들도 속출했다. 생존 피해자들은 "급소를 맞아서 죽은 사람도 있고, 맞고 넘어지면서 뇌진탕으로 죽은 사람도 있다. 이미 숨이 끊어졌는 데도 꾀병을 부린다면서 죽은 사람을 두드려패기도 했다"고 말했다.
 
수용시설은 직원부터 원생들까지 소대장-반장-일반 아동으로 계급이 철저히 나뉘어 있었다. 같은 원생이라도 간부급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힘없는 일반 아동들은 몸을 더 밀착해야했다. 작은 몸부림을 치거나 공간을 넘어가면 가차없는 폭행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동성간 성폭행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생존 피해자 손석주씨는 눈물을 쏟으며 "그게 특별한 일이 아니고 거기서는 비일비일비재했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원생들은 자신과 같은 또다른 피해자들을 수집하는 역할에 동원되기도 했다. 일반인들에게는 '단속', 원생들 사이에서는 '달러간다'는 은어로 통용되었는데 사실상 '인간 사냥'이었다. 영화숙과 재생원에서는 하루 50명의 할당량을 부과하고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구타와 가혹행위가 쏟아졌다. 원생들은 비슷한 처지에 있던 고아나 가출소년, 소매치기 아이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부모가 있는 아이들을 납치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 생존 피해자들은 "부모의 손을 잡고 가는 아이의 뒤를 따라가며 '제발 손만 놔라. 그 손을 놓는 순간 너는 행복 끝, 불행 시작'이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사망자가 발생하면 시신을 처리하는 것도 같은 원생들의 역할이었다. 원생들은 어제까지 친구였던 아이들의 시신을 지게에 지거나 끈에 묶고 산으로 올라가 묻어야했다. 하루에 사망자가 여러 명 발생하면 수레를 동원하기도 했다. 생존 피해자 조상철(가명)씨는 "지금이라면 내가 그걸 왜 지고 갔을까 하겠지만, 그때는 무서운 줄도 몰랐다. 내가 안 하면 맞으니까. 그때는 그게 죄인 줄도 몰랐다.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참혹했던 시간을 회상했다. 현재 영화숙-재생원 건물은 사라졌지만 당시 수용시설에서 사망한 다수 원생들의 유해는 뒷산에 그대로 묻혀있다.

박정희 정권의 사회정화사업, 폭력 현실 눈 감았던 지자체
 
 KBS 1TV <시사직격> '지옥에서 살아남은 소년들 - 영화숙과 재생원의 기억' 편의 한 장면

KBS 1TV <시사직격> '지옥에서 살아남은 소년들 - 영화숙과 재생원의 기억' 편의 한 장면 ⓒ KBS

 
이러한 민간인 복지시설을 빙자한 인권유린과 착취는 왜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이토록 오랫동안 은폐될 수 있었을까. 1960년대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취약한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해 '사회정화사업'을 추진했다. 6·25 전쟁 이후 거리마다 넘쳐나던 고아와 부랑인들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격리하는 것은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기에 더없이 좋은 수단이었다. 정권의 비호 속에 영화숙과 재생원과 같은 민간인 복지시설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않고 수용자들의 숫자를 늘리는 데 집중했다. 국가보조금과 각종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복지시설에는 아이들의 '머릿수가 곧 돈'이었기 때문이다. 운영자들에게는 복지의 탈을 쓴 이권 사업에 불과했다.
 
특히 부산은 한국전쟁 직후 전쟁 고아들이 몰렸고 해외구호단체들의 지원이 집중된 특수한 지역이었다. 한편으로 이런 원조 물자들을 중간에서 착복하여 수익을 누리는 이들도 넘쳐났다. 형제복지원 원장인 박인근이나, 영화숙같은 민간인 복지시설 운영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단법인 영화숙을 설립한 것은 이순영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영화숙과 재생원을 운영하는 원장이면서 가축을 기르는 축사를 만들어 수익을 냈다. 원생들은 축사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부산시는 과연 이순영과 영화숙의 실체를 몰랐을까. 1960, 1970년대 부산시가 보조금 지급과 재단운영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운영 정비 지시를 내린 공문이 발견됐다. 이순영 측이 재단 운영의 기본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지만 몇 년째 비슷한 공문을 보내면서도 그 이상의 구체적인 조치를 하지는 않았다. 시가 관리-감독의 역할을 방기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또한 이순영만이 아니라 당시 영화숙 이사진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국회의원과 같은 정관계 인사에서부터 퇴역군인, 공무원 출신 등 해당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1970년대 들어서야 언론을 통해 이순영과 영화숙 재단의 비리가 하나둘씩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화숙 인근의 행려환자 구호소에서 활동했던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영화숙의 실상을 알리고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앞장서서 노력했던 인물이다. 소 신부와 가톨릭계는 부산시에 영화숙의 비리를 고발하고 원생들을 모두 인수할 것을 시도했다. 이에 반발한 이순영은 어린 원생들을 강제로 동원해 소 신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6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대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영화숙 측에 고작 30만 원의 벌금형을 내리는 데 그쳤다. 이순영은 자신을 비호하는 세력이 많다고 자부하며 더욱 기세등등 했다고 한다. 1971년 법정공방이 진행되던 당시 영화숙과 재생원에 있던 원생들은 대부분 다른 복지시설로 나뉘어 위탁됐다. 근근이 운영을 이어가던 재단도 1976년 문을 닫았다. 이순영은 대법원 판결 4년 뒤 1981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그가 재단을 운영하면서 원생들을 착취하며 축적한 자산들은 후손들에게 상속됐다.
 
이순영의 아들 이씨는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으며 당시 아버지 이순영을 '한국 최대의 사회사업가'로 홍보했고, 자서전에는 영화숙과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며 아버지를 원생들에게 친아버지처럼 존경받던 인물로 미화하기도 했다. 이씨는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우리가 영화숙-재생원을 잊지 않아야 하는 이유
 
 KBS 1TV <시사직격> '지옥에서 살아남은 소년들 - 영화숙과 재생원의 기억' 편의 한 장면

KBS 1TV <시사직격> '지옥에서 살아남은 소년들 - 영화숙과 재생원의 기억' 편의 한 장면 ⓒ KBS

 
지난 2022년 8월 과거사위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실이 드러나 원생 3000여 명이 퇴소 조치된 지 무려 35년 만에야 국가기관이 처음으로 민간인 복지시설로 위장한 인권범죄를 국가폭력으로 규정했다는 데 의미가 크다.
 
하지만 영화숙과 재생원 사건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형제복지원이나 성람재단 사건만큼 주목받지는 못했다. 지난해 11월 언론보도를 통하여 영화숙-재생원의 인권유린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의 생존자들은 피해자 협의회를 결성하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와 부산시에 진상규명을 간절히 촉구하고 있다.
 
지금의 부산시는 영화숙-재생원 사건에 대해 어떤 입장일까. 부산시 측은 50년이나 지난 사건이라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데다 당시 시민인권 의식의 한계를 거론하며 현 시점에서 관리-감독 실태를 말하기는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부산시와 경찰 당국 등은 하나같이 먼저 과거사위에서 직권조사가 선행되어야만 유해 발굴 등의 후속 작업도 진행될 수 있다는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한편 부산시의회 행정문화위원회는 지난 3월 '부산시 형지복지원 사건 피해자 명예회복 및 지원에 관한 조례 전부개정안'을 가결했다. 기존에 조례가 '1975~1989년 부산시 소재 형제복지원에서 발생한 사건'로 적용대상을 한정했다면, 개정된 조례에는 영화숙과 재생원처럼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부산시 소재 집단수용시설에 국가 등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해 강제로 수용된 이들에 대한 인권유린 사건'으로 피해 기간과 대상을 넓혔다.
 
더불어 적극적인 진상규명을 위해 '피해자 및 자료발굴' 조항을 신설해 피해자들에 대한 상담·심리치료, 의료·생활안정지원, 추모기념사업 등을 추진하고 또한 기존 '진상규명 추진위원회'의 존속기한을 연장·운영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누군가는 '왜 오랜 세월이 흐른 일을 이제 와서 들추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이 사건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우리가 일제강점기 위안부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잊혀진 과거'로 생각해선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제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이제 대부분 고령이 되었고 남은 생존자들도 많지 않다. 이 사건에서도 국가는 사회적 약자인 국민들을 제대로 보호해야 할 역할과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 하루 빨리 진상조사가 이루어져서 피해자들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는 것이 우리 사회와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이다.
시사직격 형제복지원 영화숙 인권유린 민간인수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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