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3월 박찬욱 감독은 정서경 작가, 임필성 감독, 류성희 미술감독과 함께 JTBC 영화 토크쇼 <방구석 1열>에 출연했다. 당시 박찬욱 감독의 절친한 후배인 임필성 감독은 박찬욱 감독이 <3인조>의 흥행이 실패했던 1990년대 후반 동료 영화인들과 밤새 술을 마시면서 한국 영화계에 대한 불만을 쏟아낸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

당시 박찬욱 감독은 죽기 전에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냐는 임필성 감독의 질문에 '뱀파이어가 된 신부'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당연히 동료들은 박찬욱 감독의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저 선배가 아직 정신 못 차렸네'라고 생각하며 웃어 넘겼다고 한다(그리고 당시 같은 자리에 있던 봉준호 감독은 '나는 한강 다리에서 괴물이 나오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다가 동료들의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세기 말 박찬욱 감독이 했던 상상은 현실이 됐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의 이야기가 2009년 4월 전국 극장을 통해 개봉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은 같은 해 칸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진출해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복수 3부작'을 끝내고 주춤했다고 평가 받던 박찬욱 감독을 다시금 세계적인 감독으로 끌어 올려준 송강호, 김옥빈 주연의 영화 <박쥐>였다.

 <박쥐>는 2009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박쥐>는 2009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 CJ ENM


서양의 전유물이었던 흡혈귀 영화들

<부산행>과 <킹덤>, <지금 우리 학교는> 등이 인기를 끌면서 어느덧 한국도 '좀비강국(?)'으로 거듭났지만 사실 흡혈귀나 뱀파이어는 서양의 전유물이었다. 실제로 뱀파이어라는 단어는 세르비아어 '밤피르'에서 따온 것이고 뱀파이어라는 개념 역시 영국소설 <드라쿨라>를 통해 세계적으로 크게 유명해졌다. 뱀파이어와 흡혈귀가 등장하는 영화들 역시 서양에서 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94년에 개봉한 닐 조단 감독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1976년에 발표한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작품으로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 안토니오 반데라스 등 할리우드 미남배우들이 뱀파이어를 연기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덕분에 기존의 호러 영화를 통해 오랜 기간 관객들에게 박혀 있던 뱀파이어들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이미지가 매혹적이고 환상적으로 바뀌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영화들 중 가장 높은 흥행 성적을 기록한 영화는 <트와일라잇> 시리즈다. 신예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로버튼 패틴슨을 단숨에 스타로 만들어준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2008년 <트와일라잇>을 시작으로 2012년 <브레이킹던 part2>까지 매년 한 편씩 개봉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5편 합쳐 33억77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2012년에 개봉했던 팀 버튼 감독의 <다크 섀도우>는 '괴짜' 팀 버튼 감독의 작품답게 호러와 코미디, 판타지 요소가 적절하게 섞인 독특한 뱀파이어 영화다. <다크 섀도우>는 1억5000만 달러라는 많은 제작비에 비해 흥행성적(2억4500만 달러)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조니 뎁을 비롯해 에바 그린, 미셸 파이퍼, 클로이 모레츠, 헬레나 본햄 카터 등 쟁쟁한 배우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이다.

한국에는 2006년에 개봉했던 김수로, 조여정 주연의 <흡혈형사 나도열>이 그나마 가장 성공한 흡혈귀 영화로 꼽힌다. 조금 더 옛날로 돌아가면 1992년에 개봉했던 심형래 감독, 주연의 <영구와 흡혈귀 드라큐라>라는 영화도 있었는데 영구가 오서방(오재미 분)과 힘을 합쳐 드라큐라를 무찌른다는 내용의 어린이 영화다. <영구와 흡혈귀 드라큐라>에서는 신인 시절의 정선경도 볼 수 있다.

두 아이디어가 하나로 합쳐지며 탄생한 영화

 뱀파이어 신부에 관련된 영화는 박찬욱 감독(오른쪽)이 20세기 후반부터 구상했던 이야기였다.

뱀파이어 신부에 관련된 영화는 박찬욱 감독(오른쪽)이 20세기 후반부터 구상했던 이야기였다. ⓒ CJ ENM


박찬욱 감독은 뱀파이어가 되는 신부 이야기를 구상하다가 <공동경비구역JSA> 촬영 당시 송강호에게 신부 역할을 제안했다. 한편 <박쥐>의 원작인 프랑스 소설 <테레즈 라캥>은 박찬욱 감독이 따로 만들려 했던 프로젝트였는데 <박쥐>의 공동 제작자 안수현PD가 박찬욱 감독에게 두 이야기를 합쳐 보라고 제안했고 박찬욱 감독이 정서경 작가와 함께 시나리오를 쓰면서 <박쥐>의 이야기가 완성됐다.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많은 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박쥐> 역시 개봉과 함께 관객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크게 갈렸다. 하지만 여느 영화들처럼 '무지성 별점테러'를 당한 게 아니라 각종 영화 커뮤니티에서 <박쥐>를 좋아하는 쪽과 싫어하는 쪽이 나눠져 토론의 장이 열렸다. 그렇게 유료관객들의 '토론배틀'이 벌어진 <박쥐>는 전국 223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에 성공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류성희 미술감독이 완성한 주인공들이 거주하는 건물도 대단히 인상적이다. 일본식 가옥에 한복 집이 있고 그곳에 놀러 온 사람들은 보드카를 마시고 트로트를 들으면서 마작을 즐긴다. 게다가 그곳엔 한국으로 시집 온 필리핀 여성도 있고 가장 이질적인 존재인 뱀파이어 신부까지 있다. 박찬욱 감독은 이런 이질적인 것들이 한데 모여 묘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한국적인 잡스러움'이라고 표현했다.

<다세포 소녀>로 위기 맞은 김옥빈의 전화위복

 김옥빈은 <박쥐>에서의 열연을 통해 <다세포 소녀>의 아쉬움을 털어 버렸다.

김옥빈은 <박쥐>에서의 열연을 통해 <다세포 소녀>의 아쉬움을 털어 버렸다. ⓒ CJ ENM


<여고괴담4-목소리>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김옥빈은 신비로운 이미지로 한창 유명세를 타다가 2006년 '이재용 감독의 흑역사'로 꼽히는 영화 <다세포 소녀>에 출연하며 커리어 첫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많은 여배우들이 거절했던 <박쥐>의 태주 역할을 맡아 뱀파이어 신부를 파멸로 이끄는 치명적인 순수함을 연기하면서 스페인 시체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전성기를 활짝 열었다.

<공동경비구역JSA>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주연을 맡았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카메오로 출연했던 신하균은 5년 만에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 출연했다. 박찬욱 감독은 신하균이 맡은 강우 역할이 배우의 이름값에 비해 비중이 크지 않은 조연이라 내심 캐스팅을 걱정했는데 송강호가 신하균을 설득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리고 신하균은 풍부한 표현력으로 <박쥐>의 완성도를 높여줬다.

김혜자, 고두심 등과 함께 '국민엄마'로 불리는 김해숙 배우는 <박쥐>에서 기우의 어머니이자 태주의 시어머니 라여사 역을 맡았다. 라여사는 아들 기우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쓰러져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로 상현과 태주의 보호를 받는다. 라여사는 영화 후반 뛰어난 동공 연기를 통해 아들을 죽인 범인을 사람들에게 알리지만 태주는 이미 뱀파이어가 됐고 그 때부터 흥분한 태주의 살육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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