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서비스가 영화와 드라마 등 영상매체를 접하는 주요 창구로 자리잡았다. 신작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을 필요가 사라져간다. 내 집 안방에서 얼마든지 최신작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저예산에 쪽대본, 영화는 돈과 공을 들인 작품이란 인식 또한 더는 통하지 않는다. 극장이냐 안방이냐의 차이뿐, 영화와 드라마 사이의 경계는 흐릿해져만 간다.

그래서일까. 영화판 몸값 높은 감독들이 OTT 서비스에서 배급되는 드라마로 옮겨가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박찬욱이 HBO 드라마 <동조자>를, 연상호는 넷플릭스 <지옥>을, 김지운은 애플티비+에서 <Dr. 브레인>을 찍었다. <행복의 나라> 추창민은 디즈니+ <탁류> 연출을 확정지었고, <수리남> 윤종빈도 디즈니+에서 <나인 퍼즐>을 촬영한다. 이준익은 티빙에서 <욘더>를 오리지널 시리즈로 촬영했다. 한국 영화판의 유망한 감독 대다수가 여러 OTT 서비스 업체들과 계약을 맺고 작품활동을 이어가는 것이다.

드라마와 영화의 차이가 모호한 시대다. OTT 서비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된 작품은 영화처럼 극장 상영관을 빌려 평론가며 기자 대상 시사회도 연다. 회차마다의 기승전결과 나름의 클라이맥스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여러 편이 하나의 시리즈를 구성하는 드라마와 단편 영화 사이의 차이가 또 있는지를 가늠하기 어렵다.

폭군 포스터

▲ 폭군 포스터 ⓒ 디즈니+


유명 감독 영입 러시, 디즈니+ 야심작

<폭군>은 일류 영화감독을 앞세워 공격적으로 오리지널 시리즈를 내고 있는 디즈니+의 4부작 드라마다. 앞서 적었듯 윤종빈과 추창민 등 이름 있는 감독들과 계약한 디즈니+가 박훈정과 함께 제작한 작품이다. 통상의 TV드라마보다 훨씬 짧은 4부작이다. 합치면 2시간30분가량, 좀 긴 러닝타임의 영화와 구분되지 않는다.

시나리오부터가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에 있다 해도 좋다. 두 장르의 장단을 뒤섞어 가졌다. 40분이 채 되지 않는 각 회차마다 기승전결이 분명하다. 인물을 옮겨가며 각자의 서사를 얼마쯤 드러낸다. 한 인물, 하나의 굵직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대신, 좋게 보면 다채롭고 나쁘게 보면 산만한 진행이 이어진다. 풍성함과 어수선함 사이에서 <폭군>은 감독 박훈정의 색채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박훈정이 누구인가. 영화 팬이라면, 특히 누아르를 즐기는 이라면 그의 이름을 모를 수 없다. 한국 누아르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신세계>가 그의 대표작이다. 2011년 개봉한 데뷔작 <혈투>를 대차게 말아먹고 와신상담해 제작한 두 번째 작품이었다.

이들 작품을 발표하기 이전에도 박훈정은 영화판에 제법 이름이 난 인물이었다.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 류승완의 <부당거래>를 쓴 각본가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2010년 한 해 한국영화판을 달군 두 작품이 한 작가 손에서 태어났으니 그를 주목하는 시선이 쏟아진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김대우, 최동훈 등 일류 각본가가 걸은 길을 박훈정 또한 따라 걸었다. 각본을 넘어 직접 연출에 도전한 것이다. 영상이 아닌 글이 본업인 작가가 지닌 강점, 즉 밀도 높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재주가 그의 특장점이 될 것이라 예상하는 이가 많았다. 더구나 사회부조리와 공권력의 부패 따위를 인간의 욕망과 맞물려 풀어가는 솜씨가 누아르란 장르에서 특화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컸다.

폭군 스틸컷

▲ 폭군 스틸컷 ⓒ 디즈니+


진한 누아르 중심에 여성을 세우는 이유

전술했듯 <신세계>는 박훈정이란 이름을 한국영화판에 아로새겼다. 그러나 이후는 높아진 기대치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했다 해도 좋겠다. 2017년 작 <브이아이피>가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행하던 페미니즘적 비판 아래 침몰한 건 박훈정의 필모그래피, 나아가 한국 남성향 영화 변천사의 결정적 장면이라 해도 좋다.

여성캐릭터의 활용이며 신체묘사가 부적절하다는 맹폭이 이어졌고, 별점테러까지 받은 끝에 영화는 제 가치를 조명 받지 못한 채 막을 내려야 했다. 그 뒤로부터 박훈정이 이를 악물고 여성을 주인공 삼은 작품들만 줄줄이 찍어내고 있다는 점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폭군>은 <마녀>, <낙원의 밤>, <마녀(魔女) Part2. The Other One>에 이어 여성 주인공을 앞세운 박훈정식 누아르다. 김선호, 차승원, 김강우 등 무게감 있는 남성 주·조연들이 활약함에도 극의 중심에 있는 건 어디까지나 조윤수가 분한 자경이다. 본체인 여동생과 오빠의 인격이 한 몸에 든 이중인격 캐릭터에 무시무시한 격투역량을 지닌 본투비(Born to be) 킬러로 그녀의 존재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영화 속 정보부 요원들과 건달, 킬러 중 누구도 그녀와 상대해 우세를 점하지 못할 정도다. 가히 '사기캐', 소위 '먼치킨 캐릭터'가 아닌가.

드라마는 첩보물과 액션, 누아르를 뒤섞은 장르물이다. 속한 곳 없이 길바닥을 전전하는 프리랜서 킬러 자경이 아버지를 잃은 뒤 벌이는 복수극이 어느 순간 한국과 아마도 미국임을 예상케 하는 강대국 사이 물밑 첩보전에 휘말려드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국정원 내의 여러 분파 가운데 최국장(김선호 분)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국방을 가능케 해야 한다는 조직 내 강경파의 대표격 인물이다. 한때는 핵보유를 그 수단으로 삼았던 강경파가 이제는 강화인간을 양산하는 '폭군 프로그램'에 사활을 걸었단 게 <폭군>의 설정이다.

불행히도 미국은 이 프로그램의 존재를 알아냈고, 요원 폴(김강우 분)을 파견해 바이러스를 가로채려 한다. 이 과정에서 우연히 바이러스를 손에 쥔 자경의 활약이 상황을 종잡을 수 없도록 꼬아버린다.

폭군 스틸컷

▲ 폭군 스틸컷 ⓒ 디즈니+


<마녀>부터 시작된 박훈정 유니버스

과학기술을 통한 신체강화, 그를 통한 인간병기화라는 설정은 전작 <마녀>부터 시작된 하나의 세계관을 떠올리게 한다. 이기영 등 몇몇 배우가 <마녀> 시리즈와 유사성이 있는 배역을 맡은 점, 또 <폭군>의 에필로그를 통해 드러난 설정도 이 같은 추측에 힘을 더한다.

그러나 <마녀>와 <폭군>이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다. 그 유사성과 모호함이 이를 즐기는 이에게는 해석의 즐거움을, 딱 맞아떨어지는 무엇을 원하는 이에겐 실망을 던질 수도 있겠다.

<폭군>의 주된 이야기가 한국과 강대국 사이의 첩보전이란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미 <브이아이피>에서 미국과 한국, 북한, 중국 등이 개입한 물밑 정보전과 첩보전을 다뤘던 그다. 이번에도 평범한 시민의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상과 그 부조리함을 강조하는 가운데, 힘을 갖기 위해 발버둥치는 약소국의 현실을 장르물의 배경이자 설정으로 활용한다.

아쉬운 건 여러 경로로 알려진 첩보의 실상과 영화가 다루는 현실 사이에 상당한 괴리감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강화인간 바이러스를 쟁탈하려는 두 나라의 물밑 경쟁과 그 사이에서 죽어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분히 현실성이 떨어지게 묘사된다. 법과 질서가 없는 양 수십 명의 사람이 죽고 죽이는 상황이 수차례에 걸쳐 반복되는데도, 그로부터 어떠한 제약이나 사회적 후폭풍도 일지 않는 것이다.

이밖에도 정보조직 내 고위 인사가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군사 프로젝트를 국가의 감시 없이 사적으로 수행해왔다는 점도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막연한 상상이 아닌가. 어디까지나 꾸며낸 극일지라도 보는 이를 설득할 만큼의 핍진성은 필요한 것이다.

4부작 드라마를 이어볼 때의 문제 역시 선명하다. 영화라면 속도감 있게 치고 나갈 이야기가 매회 고조되다 허물어지기를 반복한다. 각 한 회차를 뜯어보자면 기승전결이 있는 구성이라 하겠으나, 전체 이야기를 놓고 보면 잔가지가 많고 필요 이상 늘어지고 마는 것이다. 전체 러닝타임으로 보자면 영화와 비슷한 작품이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될 때의 이점이 무엇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여러모로 <폭군>은 박훈정의 이름값을 하지 못한다. <마녀>가 아닌 <신세계>를 기준점으로 잡는다면 더욱 그러하다. 한때는 한국 누아르의 대표주자가 될 것이라 기대했던 이다. 그러나 그의 현재는 <폭군>이다. 한국 영화, 또 누아르의 팬이라 자임하는 이 가운데 누가 이 작품에 만족할 수 있을까. 나는 없다고 본다.

폭군 스틸컷

▲ 폭군 스틸컷 ⓒ 디즈니+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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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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