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각자의 삶에선 주인공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제 삶조차 조연처럼 꾸려가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조연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주연에겐 주연의 책임이, 조연에겐 조연의 역할이 있다는 뜻이다. 삶의 무게를 정면에서 떠받치는 대신 떠밀리고 돌아서며 도망치는 삶이란 주인공의 것일 수는 없는 일이다.

서포터를 직역하자면 지지자 정도가 되겠다. 무엇을 지지하고 응원하며 후원하는 자, 그것이 서포터다. 스포츠, 특히 프로축구 문화가 갖는 특별함이 있다면 보는 이를 그저 팬쯤으로 남겨두지 않는단 거다. 통상 사각진 경기장 관중석 가운데 양쪽 골대 뒤편 좁은 면을 서포터가 차지한다. 깃발이 나부끼고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일어서 노래를 부르며 주먹을 휘두르는 이들. 어째 경기를 보러 와서 가만히 즐기지 않는 거지. 그런 물음이 들 법도 하다. 팬, 즉 무엇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이, 그런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이들에게 있다. 내가 즐기는 걸 넘어 남을 지지하는 걸 더 중요하다 믿는 이들, 대형 깃발을 휘두르고 홍염을 터뜨려 시야가 가려질지라도 우리 팀이 힘을 얻는다면 기꺼이 그리하려는 이들, 그것이 바로 서포터다.

통상 경기장의 주인공이라 하면 선수단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지지를 받는 자와 지지를 보내는 자 사이엔 주연과 조연처럼 확고한 역할 구분이 나뉘어 있는 탓이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면 그 구분 또한 달라진다. 서포터가 주인공인 관점이 틀림없이 존재한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은 바로 그에 대한 영화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포스터

▲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포스터 ⓒ 영화사 진진

 
서포터즈가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스포츠는 잔혹하다. 매 경기, 매 시즌, 승자와 패자가 나뉜다. 좋은 선수와 못한 선수가, 나은 팀과 떨어지는 팀이 가려진다. 해야 할 것을 해내는 이가 있고 도전에 실패하는 이가 있다. 서포터에게도 마찬가지. 제게 주어진 선택의 순간 가운데 나아가고 부딪히고 마침내는 이뤄내는 서포터가 있는 것이다. 절대 흔하지 않은 선택들과 그에 따른 수고들을 기꺼이 감당해 낸 서포터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선호빈과 나바루, 두 다큐멘터리 감독이 그에 주목했고, 나는 그 결과를 영화로 마주했다. <수카바티>가 FC안양 지지자들을 넘어 K리그, 나아가 스포츠를 이해하는 많은 이들에게 다가서야 한다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보라돌이, 그러니까 'A.S.U. RED(Anyang Supporters Union RED 이하 레드)'가 <수카바티>의 주인공이다. 영화는 레드가 걸어온 고난과 성취의 역사를, 또 실망과 희망이 어우러진 현재를 담았다. 안양LG치타스가 연고를 버리고 서울로 이전한 과정(2004년)을, 팀을 잃고 견뎌야 했던 지난한 시간을, 안양에 다시 시민구단을 창단(2013년)하기 위해 들인 노력을, 그로부터 쟁취한 새로운 연고 팀을 응원하는 모습을 내보인다. 다른 누구였다면 감히 하지 못했을 것을 이들이 해냈다는 걸 보여준다. 그건 결코 당연하지 않은 일들이었다.

지난 7월 25일부터 3일까지 레드의 역사를 이뤄온 이들과 서면 및 전화 인터뷰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저 축구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모든 걸 빨아들이는 서울과 무력하게 제 자산을 빼앗겨야 하는 지역의 관계를,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지역에 중력과 문화를 만들어가는 이유를 물었다. 연고 팀을 빼앗기고 시민구단을 창설하기까지의 과정에서 한국 사회를 잠식해 나가는 구조적 문제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스틸컷

▲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스틸컷 ⓒ 영화사 진진

 
FC안양 지지자의 마음

최지은은 레드의 결성자다. K리그가 아직 슈퍼리그라고도 불렸던 시절, 초창기 서포터를 만들어 그 문화를 선도했다. 최윤용은 7대 레드 회장이다. 연고 이전 당시의 회장이었다는 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유재윤은 지난 2018년까지 RED를 이끈 9대 회장이다. 이들 세 명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구단이 만들어지는 과정, 안양이라는 지역의 지역성에 축구가 기여하는 바, 이 영화가 가진 가치 따위를 물었다.

구단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일까.

최지은은 '철저하고 의도적인 외면'이었다고 답한다. 그는 "타 서포터 클럽들의 지지성명, 그조차 100% 다 돕지는 않았고 비웃고 조롱하던 단체가 있었다. 언론이나 축구 관련 종사자 누구도 '버려진, 버려질 사람들'의 슬픔이나 상실감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최씨는 "거대기업의 자본과 공생하는 언론의 한계를 목도했고, 도무지 우리의 이야기를 전할 길이 없어 막막하던 시간"이라고 회상했다.

최윤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하던 동료들의 이탈로 인한 인력 부족 때문에 활동의 제약과 허전함이 컸다"며 "활동하는 단체의 인원수가 적다 보니 정치인, 지역유지, 공무원들의 관심이 하락하고 추진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했다.

유재윤은 "언젠가 다시 팀을 만들자고 모였던 동료들이 하나둘씩 나오지 않게 되고 떠나갈 때 외로움이 컸다"고 떠올렸다. 그는 "팀이 없는 상태가 끝이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며 "의회 의원들의 비협조와 반대를 위한 반대로 안건이 부결되고 수시로 정회가 되는 등 의결이 진행되지 않을 때 막막했다"며 "학생이었고 이제 막 직장인이 됐던 시절에 시민들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한 행사를 준비하는 게 현실적으로 버거웠다"고 말했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FC안양 서포터즈 역대 회장단. 왼쪽부터 최윤용(7대 회장), 유재윤(9대 회장), 김준성(8대 회장).

▲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FC안양 서포터즈 역대 회장단. 왼쪽부터 최윤용(7대 회장), 유재윤(9대 회장), 김준성(8대 회장). ⓒ 나바루

 
이들은 왜 팀을 되찾아야 했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이들은 제 고장에 새로운 구단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시야를 넓혀 야구나 농구, 다른 여러 실업팀을 보자면 한국에서 연고 이전의 사례는 안양만의 상처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을 법도 하다. 포기와 적응이라는 쉬운 길 대신, 이들이 시민구단을 창단하려 여론을 모으고 시의회를 압박하는 과정이 <수카바티>의 주요한 줄기이기도 하다.

이들은 도대체 왜 팀을 만들었나. 최지은은 "나의, 우리의 일상을 복원하고 싶었다"고, 최윤용은 "즐거웠고 행복했던 시간을 되찾고 싶은 열망이 컸다"고, 유재윤은 "일상의 회복과 고통의 종결, 그리고 어렵지만 한 번만 더 퍼내면 될 것 같다는 신기루"가 노력의 근간이었다고 털어놓는다. 행복했던 과거를 빼앗긴 채 살 수는 없다는 동력, 그 인간다움의 복원이 이들에게 팀을 만들겠다는 과제로 떨어진 것이다. 주변 동료들이 하나둘 현실의 장벽 앞에 돌아설 때도 이들은 끝내 벽을 부수기를 멈추지 않았다. 세상엔 그런 이들도 있는 것이다.

<수카바티>는 지역에 대한 담론을 일으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안양LG치타스가 옮겨간 곳이 서울이기도 하거니와, 지역의 귀한 것이 도시의 흔한 것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한국 사회는 수없이 겪어왔기 때문이다. 지역 의회에 압력을 넣고 지지를 끌어내 시민들의 구단을 창단하는 과정을 지역성과 떼 놓고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최지은이 말한다. "50만 명이 살아가는 안양에서 올 시즌 여덟 번의 홈경기에서 누적관중 4만 969명을 달성했고, 앞으로 남은 경기를 볼 때 십만 명 정도의 최종 관중 기록을 세울 것"이라며 "시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FC안양 경기를 보러 찾아오는데, 이 기록이 주는 시사점이 상당히 크다"고 말했다.

최윤용은 "꼭 축구가 아니더라도 내 고장에 대한 유래, 역사에 대한 내용이 담긴 영화이기 때문에 지역 이해와 애향심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FC안양은 '함께해보라'와 같은 봉사활동, '학교원정대', '나도축구선수다' 같은 시민 소통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지역민과 만나고 있다. 이런 것이 축구, 나아가 스포츠의 선순환적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스틸컷

▲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스틸컷 ⓒ 영화사 진진

 
FC안양, K리그, 나아가 지역에 대한 이야기

유재윤 또한 "애향심은 물론이고 이런 팀과 영화로 (시민들이) 여가를 보낼 수도 있다"면서 "주변 상권의 수익도 늘고 시 홍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역성 있는 콘텐츠가 계속 제작될 수 있도록 지자체와 시민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수카바티>는 그저 축구 팬, 또 안양의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것이 지역성을 가진 모든 지방, 나아가 꿈꾸고 열망하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최지은은 "어떤 스포츠인지와 상관없이 현재 어떤 팀의 지지자라면 (다큐를 통해) 내 팀을 어떻게 건강하게 지켜 나갈지 함께 고민하고 공감했으면 좋겠다"라며 "축구 팬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오신 분들에게도 어쩌면 맹목에 가까운,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바보 같은 녀석들(안양 응원가 제목입니다)'의 인생을 즐겨 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최윤용은 "대한민국 서포터의 태동과 과정, 역사가 담겨있어 FC안양의 팬이 아니어도 충분히 볼 만한 거리가 있다"며 "다큐지만 한 편의 드라마이기도 해서 안양이나 축구를 몰라도 웃고 울 수가 있는 재미있는 영화"라고 추천했다. 유재윤은 이에 더해 "살아가는 게 힘든 모든 이들에게 공감과 위안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라고 넌지시 기대했다.

그러고 보면 <수카바티>는 한국에서 흔치 않은 영화가 분명하다. 팀을 잃은 서포터, 그들이 새로 팀을 만들고 지역에서 중력을 일으키는 과정을 선명히 보여주니 말이다. 돈이 되는 모든 것이 중앙으로 옮겨가는 이 시대에 지역과 사람과 마음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그렇다면 왜 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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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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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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