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영화에서 특정 배역의 배우를 교체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다. 자칫 배우 교체가 기존 관객들의 실망으로 이어질 경우 시리즈 전체에 대한 인기와 관심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배우 교체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바로 제임스 본드 역을 피어스 브로스넌에서 대니얼 크레이그로 교체하면서 시리즈가 재평가 받았던 <007 카지노 로얄>이었다.
 
 <카지노 로얄>은 제임스 본드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리부트' 영화였다.

<카지노 로얄>은 제임스 본드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리부트' 영화였다.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주)

 

시리즈 역대 최고의 흥행배우

지난 1968년 직업 군인이었던 아버지와 미술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크레이그는 6살 때부터 학교에서 연극을 시작했고 16살 때 런던의 국립 청소년 연극단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웠다. 그리고 1992년 영화 <파워 오브 원>에서 극단적 인종주의와 나치를 숭상하는 독일계 악역 야피 보타 역을 맡으며 스크린에 데뷔했다. 크레이그의 대표 캐릭터 제임스 본드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다.

크레이그는 2001년 <툼 레이더>와 2002년 <로드 투 퍼디션>, 2005년 <뮌헨> 등에 출연하면서 커리어를 이어갔다. 크레이그는 2000년대 초·중반까지 영국 노동자 계층의 고단함을 담아낸 역할이나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던 2006년 크레이그는 만37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고 숀 커너리와 고 로저 무어 같은 명배우들이 거쳐 간 < 007 >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역에 낙점됐다.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007 카지노 로얄>은 1억5000만 달러라는 많은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제작비의 4배가 넘는 6억1600만 달러의 흥행 성적을 올리며 크게 성공했다(박스 오피스 모조 기준). 이는 피어스 브로스넌의 마지막 영화였던 <007 어나더 데이>의 4억3100만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성적으로 크레이그는 <카지노 로얄> 한 편으로 007과 제임스 본드를 상징하는 배우가 됐다.

물론 인기 프랜차이즈 시리즈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많은 배우들이 그런 것처럼 크레이그 역시 < 007 > 시리즈를 제외한 다른 작품에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특히 <아이언맨>의 존 패브로 감독이 연출하고 해리슨 포드와 호흡을 맞췄던 <카우보이 & 에이리언>의 흥행 실패는 크레이그에게도 당황스런 결과였다. 하지만 크레이그는 < 007 >과 타 작품을 병행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2017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범죄 코미디 <로건 럭키>를 통해 연기 변신을 시도한 크레이그는 2019년 <나이브스 아웃>에서 프랑스계 미국 탐정 브누아 블랑을 연기하며 극찬을 받았다. 2021년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끝으로 제임스 본드 역에서 하차한 크레이그는 2022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에 출연했다.

'신의 한 수' 된 시리즈의 리부트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던 그 어떤 배우도 대니얼 크레이그보다 높은 상업적 성과를 올리진 못했다.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던 그 어떤 배우도 대니얼 크레이그보다 높은 상업적 성과를 올리진 못했다.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주)

 

'5대 제임스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은 TV시리즈 <레밍턴 스틸>로 얼굴을 알렸던 배우였지만 크레이그는 < 007 >에 합류하기 전까지 주연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카지노 로얄>부터 <노 타임 투 다이>까지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5편의 영화는 무려 39억6700만 달러라는 눈부신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흥행으로는 크레이그가 역대 제임스 본드 중 단연 '으뜸'인 셈이다.

크레이그가 출연한 <카지노 로얄>은 프랜차이즈 내에서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지금까지의 시리즈가 그 이전 작품들과 설정이 공유되는 영화들이었다면 <카지노 로얄>은 제임스 본드가 007로서 맡은 첫 임무를 다룬 '리부트' 영화였다. 다시 말해 이미 경험이 쌓일 대로 쌓인 베테랑 첩보원이 아닌 이제 막 00 넘버를 받은 '풋내기 첩보원' 제임스 본드를 만날 수 있는 영화라는 뜻이다.

시리즈의 시그니처 대사 중 하나인 "이름은 본드요. 제임스 본드(The Name's Bond. James Bond)." 역시 영화 초반이 아닌 엔딩 크래디트가 올라가기 직전에 나온다. 이는 지금까지 관객들이 알고 있는 제임스 본드가 아닌 완전히 다른 '대니얼 크레이그의 재임스 본드'가 탄생했다는 것을 선언하는 대사였다. 실제로 <카지노 로얄>은 시리즈 역대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극찬을 받았다.

제목이 <카지노 로얄>인 만큼 영화에서는 카지노에서 벌어지는 포커 게임이 꽤 중요하게 다뤄진다. 하지만 <카지노 로얄>은 포커 게임보다는 게임 도중 벌어지는 제임스 본드의 임무에 집중했기 때문에 포커를 몰라도 감상에는 크게 지장이 없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포커 마니아'로 나오는 제임스 본드와 달리 크레이그도 포커를 전혀 할 줄 몰라 게임 전문가에게 포커를 배워가며 촬영에 임했다.

<카지노 로얄>을 연출한 마틴 캠벨 감독은 1998년 안토니오 반데라스 주연의 <마스크 오브 조로>를 통해 이름을 알렸고 피어스 브로스넌의 첫 영화인 <007 골든 아이>로 호평을 받았다. <골든 아이>도 피어스 브로스넌이 출연한 영화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카지노 로얄> 역시 호평 일색이었다. 아무래도 캠벨 감독은 < 007 > 시리즈와 궁합이 잘 맞는 감독인 모양이다.

제임스 본드에게 트라우마 남긴 여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베스퍼(왼쪽)는 후속작에도 제임스 본드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베스퍼(왼쪽)는 후속작에도 제임스 본드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주)

 
사실 < 007 > 시리즈는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본드걸'이 많은 주목을 받는다. <카지노 로얄>에서는 프랑스 출신의 모델 겸 배우 에바 그린이 영국 재무부 회계사 베스퍼 린드 역을 맡았다. 본드와 사랑에 빠진 베스퍼는 미스터 화이트(예스페르 크리스텐센 분)에게 르 쉬프르(매주 미켈슨 분)의 자금을 주는 대가로 본드를 살려냈다. 하지만 베네치아에서 본드가 구해주려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2년 영화 <더 헌트>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매즈 미켈슨은 <카지노 로얄>에서 메인빌런 르 쉬프르를 연기했다. 아프리카 무장 단체의 자금을 관리하는 르 쉬프르는 왼쪽 눈에 부상을 당해 동공색이 탁하고 눈에서 가끔 피눈물이 흐른다. 르 쉬프르는 본드와의 포커 대결에서 패한 후 본드를 납치해 엄청난 고통을 주는 고문을 가하지만 미스터 화이트에 의해 처형 당한다.

이탈리아 배우 클라우디오 산타마리아가 연기한 폭탄 제조범 카를로스는 공항경비원으로 위장해 항공사의 신형 항공기 테러를 기도하는 영화 속 중간보스 격의 인물이다. 카를로스는 테러에 거의 성공할 뻔 하지만 본드에게 저지 당하고 자신이 만든 폭탄이 터지면서 사망한다. 대사 한마디 없는 캐릭터지만 <카지노 로얄>에 등장했던 그 어떤 캐릭터보다 제임스 본드를 괴롭힌 실력자였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007카지노로얄 마틴캠벨감독 대니얼크레이그 에바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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