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햄릿> 공연사진
국립극단
연극의 시작과 끝은 죽음에 대한 조사위원회가 열리는 장면이다. 첫 번째로 선왕의 죽음에 대한 조사위원회가 열린다. 여기서 선왕은 사고로 죽은 것으로 판명되고, 선왕의 동생인 '클로디어스'가 왕위에 오른다. 이후 마지막 장면 전에 조사위원회가 한 번 더 등장한다. 두 번째 조사위원회에서는 충신 '플로니어스'의 죽음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마지막 세 번째 조사위원회에서는 모두의 죽음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다.
플로니어스를 죽인 건 햄릿이지만 두 번째 조사위원회에서 진상은 딱히 밝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후 햄릿이 복수를 자행하고 일시적이지만 왕위에 오른다. 이런 햄릿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되고, 모두의 죽음에 대한 조사위원회가 열리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이웃 국가의 통치자인 '포틴브라스'가 위기를 수습할 총독으로 추대된다.
새로운 지도자가 된 포틴브라스는 영토 확장의 야욕을 가진 인물이다. 이쯤에서 돌이켜보면 조사위원회가 진상을 밝히는 기능을 했다기보단 나름의 야욕을 가진 인물들이 권력을 움켜쥐는 데 기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사위원회 이후 권력을 쥔 인물의 권력이 영원했는가? 그렇지 않다. 클로디어스의 권력은 저물었고, 햄릿도 마찬가지다. 이전의 사례들을 토대로 귀납적으로 추론해보면, 포틴브라스의 권력도 언젠간 무너질 것이다. 권력은 유한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연극에서 권력을 만들어낸 조사위원회만 무한하다. 조사위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해서 조사위원회가 사라져야 하는 건 아니다. 조사위원회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합리적인 장치이며, 따라서 조사위원회는 필요하다. 이것 역시 아이러니하다. 합리적인 장치가 비합리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사실 말이다.
문득 <햄릿>이 그려내는 세상을 보며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떠올랐다. 합리성의 지나친 추구는 결국 우리를 '쇠 우리(iron cage)'에 가둬 억압할 것이라는 베버의 설명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햄릿> 속 세상은 분명 그런 세상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햄릿>의 세상은 어디이고 언제인지, 그 배경을 묻게 됐다. 원작은 12세기 덴마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국립극단이 각색한 <햄릿>은 그렇지 않다. 극중 대사에 따르면 "어느 때, 어느 곳"으로, 배경을 특정해두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어느 때, 어느 곳이든 이야기를 적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작품이 말하는 세상은 과거일 수도 있고, 미래일 수도 있고, 현재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이상하지 않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햄릿>은 오는 29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이봉련을 비롯해 김수현, 성여진, 김용준, 류원준, 안창현 등이 원캐스트로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