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다. 얼마나 대단한지 육신을 넘어 영(靈)까지 주관하는 장(長)이란다. 다른 모든 생명은 그 존재부터가 인간에서 귀속된 것. 생과 사, 존재의 가치까지가 모두 인간에게 달렸다.
 
유해조수란 말이 있다. 해를 미치는 짐승을 일컫는 말이다. 무엇에의 해로움인가. 작게는 인간의 토지와 가축, 또 도구며 산업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이를 넓게 잡자는 다른 짐승, 나아가 생태계에 해를 끼치는 것이 모두 유해조수가 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고, 생태계 자체가 인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해조수를 넘어 생태계교란종까지 인간이 지정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인간에게도 명실공히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란 학명이 있다. 포유강 영장목 유인원과에 속한 아종 내 유일한 종이다. 본래 호모 에렉투스며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다른 종이 있었지만, 우리가 죄다 멸종시켰다.
 
만물의 영장이 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투쟁이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종이, 이를테면 백곰과 흑곰, 팬더며 반달가슴곰 따위가 함께 살아있듯, 수많은 아종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지만, 만물의 영장 자리는 오로지 한 종에게만 허용되는 것이었던가 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알프스 초원 노니는 늑대들, 그들의 이야기
 
늑대의 나라에서 스틸컷

▲ 늑대의 나라에서 스틸컷 ⓒ SIEFF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란 말은 인간을 달리 보도록 한다. 말하자면 생물학적 학명이 인간 또한 동물임을 일깨우게 한단 것이다. 다른 동물들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자면, 인간은 유해조수이며 생태계교란종이다. 인간만큼 다른 동물을 멸종시킨 종이 없다 해도 좋으니. 심지어는 제 친척격인 아종들마저 죄다 멸하지 않았던가.
 
제21회 서울환경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초청작 <늑대의 나라에서>는 유해조수이자 생태계교란종인 인간의 저열함을 일깨운다. 만물의 영장이란 거창한 별명치곤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치졸함으로, 얼마나 많은 종들을 멸절시켜왔는지를 알게 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알프스 자락에 위치한 독일 어느 지방엔 여러 축산농가들이 흩어져 있다. 알프스의 비옥한 초원에서 양을 방목하는 이들은 조상 대대로 축산업을 이어왔다. 양털을 깎아 팔고, 치즈를 만들고, 고기도 생산한다. 이것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니 얼마나 귀한가.
 
아름다운 초원 위로 새하얀 양떼가 노니는 모습은 절로 평화로운 감상을 자아낸다. 그를 보기 위해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그를 대상으로 한 관광업과, 각종 기념품 제작을 위한 수공업이 일어나고 지역경제는 활성화된다. 이 모두가 연쇄적 순환고리를 이루니, 선순환이란 말이 꼭 맞아들어간다.
 
그러나 모든 일이 좋을 수만은 없다. 이 일대에 사람들이 꼭 하나 없애버리고 싶은 게 있으니 그게 바로 늑대다. 밤만 되면 숲에서 나와 양들을 습격하고는 얼마 먹지도 않고 돌아가기 일쑤다. 말하자면 재미로 양들을 죽이는 거다. 높은 지능과 탁월한 운동력으로 울타리 따윈 무용지물로 만든다. 목양견 몇 마리를 풀어놔도 싸움이 되지 않는다. 양을 치는 이들이 늑대만 보면 이를 가는 이유다.
 
앞에 적었듯 양치기, 즉 축산업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산업이다. 이 일대만 해도 백만 마리를 훌쩍 넘는 양이 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삼백만 마리를 넘어섰다고 했다. 말하자면 산업 규모가 갈수록 죽고 있는 것이다. 위기론이 대두될 밖에 없는 이유다.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불안과 분노는 커진다. 늑대부터 없애버리자,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아니, 벌써 십수 년째 된 이야기다. 늑대를 없애자, 늑대를 죽이자, 늑대를 몰아내자. 그를 외치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랄프 뷔헬러의 다큐멘터리 <늑대의 나라에서>는 늑대를 없애려는 사람들과, 그 생태를 연구하며 이를 지켜내려는 이들의 대립을 흥미롭게 비춘다. 늑대가 양을 치는 이들에게 입히는 피해는 분명하다. 수시로 양들이 죽은 채 발견된다. 이 일대 늑대는 분명히 늘고 있고, 양들은 줄고 있는 것이다. 물론 비율이 아닌 수로 비하자면 비교가 성립하지 않는 수치긴 하지만.
 
연구자들은 수많은 카메라를 설치해 늑대의 일과를 관찰한다. 그 배설물이며 발자국, 또 늑대의 사체와 늑대가 해한 야생동물 등을 살펴 그 건강상태 등을 조사한다. 배설물을 뒤져 늑대가 야생동물이 아닌 가축을 얼마나 먹었는지 조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나하나가 늑대가 이 일대 산업에 치명적 타격을 가하지 않는단 걸 입증하는 과학적 근거로 쓰인다. 말하자면 연구는 늑대를 보호하기 위해 이뤄진다.
 
늑대의 나라에서 스틸컷

▲ 늑대의 나라에서 스틸컷 ⓒ SIEFF

      
가짜뉴스에 맞서는 사람들
 
수시로 '가짜뉴스'가 일어난다 한다. 이 일대 자본가들과 결탁한 언론매체가 과학적 근거 없이 일부 사실을 바탕으로 자극적 뉴스를 써대는 탓이다. 늑대를 몰아내야 한다는 여론을 부추겨 법을 바꾸고 늑대를 사냥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 위함이다. 늑대를 몰아내고, 또 지키기 위한 인간들의 싸움이 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늑대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도 있는 일이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차츰 드러내는 늑대란 녀석의 진실된 모습이다. 이해관계가 걸린 이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늑대가 인간을 공격한 사례는 발생하지 않는다. 늑대가 무분별한 사냥을 하는 사례도 생각만큼 많지가 않다. 늑대가 무엇을 사냥하는 방식 또한 연구를 통해 차츰 선명히 드러난다. 매일 무척 광대한 무리의 영역을 내달리며 수많은 종 가운데 약한 개체를 사냥한다. 병이 들고 다친 개체가 사냥의 대상이다. 후각이 특별히 발달한 늑대는 건강에 문제가 있는 개체를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고 한다. 건강한 개체의 반격을 받으면 그대로 물러나는 경우가 적잖다.
 
이 같은 사실은 늑대가 등장하는 온갖 설화와 동화, 소설과 영화를 민망하게 한다. 인간이 수백 년 동안 그려온 늑대는 인간을 수시로 습격하는 포악하고 잔학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늑대가 인간을 먹이로 삼지 않고 습격한 사례도 거의 없다는 사실은 얼마 알려져 있지 않다.
 
다큐는 과거에도 늑대를 대대적으로 토벌하기 위해 그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단 걸 일깨운다. 늑대는 언제나 특정 산업에는 위험요소로 작용했다. 특히 그들의 터전인 숲을 인위적으로 파괴하고 그곳에 농장이며 목장을 세운 경우가 그러했다. 그런 경우 늑대는 인간의 터전을 가로지르고, 인간이 기르는 여러 짐승을 습격해 죽여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해친 것인가. 인간이 늑대를 해쳤는가, 늑대가 인간을 해쳤는가. 80억 명을 돌파한 인간과 곳곳에서 멸종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늑대들 가운데 누가 유해조수이고 생태계교란종인가. 법안을 바꾸어 늑대 사냥에 나서려는 인간들을 막아 세우는 건 인간이 더는 유해조수이자 생태계교란종이 돼선 안 된다는 마지막 의지가 아닌가.
 
늑대의 나라에서 스틸컷

▲ 늑대의 나라에서 스틸컷 ⓒ SIEFF

  
늑대를 해치려는 인간들과, 그를 위해 그 포악성을 부풀려 드러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인간이 얼마나 비겁한가를 알게 한다. <죠스> 이후 인간을 해치는 상어의 모습을 수없이 반복해온 영화산업을 떠올린다. 한편에선 삭스핀으로 쓰기 위해 상어를 잡아 지느러미만 자르고 바다에 던져 죽도록 하고, 또 한편에선 참치를 잡으려다 그물에 걸린 수많은 상어를 남획해 죽게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고도 인간은 상어가 마치 저를 해치는 괴수인 양 콘텐츠로 만들어 소비한다. 실제 인간이 몇 마리의 상어를 죽이는지, 상어가 또 인간을 얼마만큼 해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비슷한 일이 어디서나 반복된다. 한국에서 야생동물은 아예 설 자리가 없다. 길이 잘려 도로로 뛰어드는 고라니는 조롱의 대상이고, 건설현장에서 나오는 맹꽁이는 돈벌이를 망치는 쓸모없는 짐승이다. 먹을 것이 없어 논밭으로 내려오는 멧돼지를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고, 곰은 잡아 가두어 쓸개에 빨대를 꼽는다.
 
하는 모습을 보자니 인간은 과연 만물의 영장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죄를 감당하겠는가.
 
<늑대의 나라에서>는 제21회 서울환경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다. 이는 오늘을 사는 한국인 가운데 우리의 오늘을 민망히 여기는 이가 남아 있단 걸 증명한다. 인간의 나라에 기생하는 늑대가 아니라고, 늑대의 나라를 완전히 멸하려는 인간을 이쯤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그렇게 믿는 이가 아직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한다. 인간이 존엄하다면 나는 그 존엄을 이러한 선택으로부터 찾아낼 수 있다 믿는다. 빌어먹을 영장 같은 것이 아니라 말이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포스터

▲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포스터 ⓒ SIEFF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 SIEFF 늑대의나라에서 랄프뷔헬러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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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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