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6년이나 됐다. 인도양을 가로질러 서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 항구까지 나다녔던 때가. 항해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자동차운반선에 몸을 싣고 먼 바다를 다니다보면 그야말로 온갖 경험을 하게 된다.
 
길이만 200m, 높이는 커다란 아파트 십수 층쯤은 족히 될 높이의 선박이다. 차량 수천 대를 싣고 대양을 건너는 이 커다란 배를 당장이라도 가라앉게 할 것 같은 험한 바다도 수차례 겪었다. 바람이며 해류에 잔뜩 밀려 벽을 밟고 움직여야 할 만큼 기울어진 배 위에서 종일 나아가도 다시 제 자리로 떠밀려야 했던 바다를 나는 여적 기억한다.
 
멋진 기억도 제법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 어느 나이든 항해사에게 들었는데, 어느 나라 어민들 가운데선 전속 항진하는 배의 선수를 측면에서 먼저 가로질러 가면 그날 재수가 좋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커다란 배 앞을 무리하게 횡단하려는 배가 이따금 있었던 것인데, 인간의 지혜로 정복할 수 없는 바다에서 삶을 꾸리는 사람 특유의 미신이란 이런 것인가 싶었다.
     
그런데 큰 배의 선수를 횡단하려는 것이 꼭 작은 어선들만은 아니었다. 몇 번쯤 마주했던 광경이다. 저 멀리서 수십 마리는 족히 될 돌고래 떼가 배의 우측면, 그러니까 구십도 각도에서 몰려들곤 했다. 우리 배의 속도를 고려하면 삼사 분 후엔 그들과 배가 부딪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처음 그들과 마주했을 때 나는 놀라서 곁의 선배 항해사를 바라봤는데 그는 이미 수차례 같은 일을 겪은 듯, 괜찮다고 미소를 지어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배는 계속 항진했고 돌고래들도 마찬가지였다. 놀랍게도 그중 몇 마리, 절반이 채 되지 않는 수가 우리 배의 선수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절반이 좀 넘는 돌고래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뒤늦게 배를 건너거나 아예 건너지 못했던 것이다. '도대체 저 녀석들이 왜 저러는 거죠?' 나의 물음에 선배는 '이따금 돌고래들이 재미로 선수를 횡단하곤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뒤로도 몇 차례 더 그와 같은 광경을 보았다.
 
모든 항해사가 이와 같은 장면을 마주하게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나는 운이 좋아 돌고래떼라거나 배를 따라 유영하는 고래 모자, 하늘과 바다를 이어 피어오른 용오름과 해수면 위로 다리를 내린 거대한 쌍무지개, 또 밤바다를 환상적으로 물들이는 야광충의 향연따윌 봤다. 그러나 어떤 이는 오래 배를 탔으면서도 그와 같은 장면을 얼마 마주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얼마나 보고 싶겠는가.
     
해녀가 된 국제결혼 이주노동자
 
숨비소리 스틸컷

▲ 숨비소리 스틸컷 ⓒ SIEFF

 
영화 <숨비소리>는 내 기억 속 먼 곳에 자리하고 있던 돌고래떼를 떠올리게 했다. 제21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한국경쟁작으로 초청된 이 영화가 돌고래를 보길 염원하는 어느 노동자를, 그녀가 생의 터전으로 선택한 바다를, 그 바다를 끼고 앉은 내 나라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숨비소리>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재학 중인 젊은 감독 김가영의 작품이다. 고작 17살의 나이에 첫 단편영화 <진단서>를 찍었다니 영화예술에 대한 열정이 어떠한지를 알 것도 같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활용돼 온 숨비소리는 수면에 올라온 해녀들이 깊은 숨을 내뱉을 때 나는 마치 휘파람 같은 소리를 말한다. 영화는 해녀의 상징이 된 숨비소리를 제목으로 삼아 어느 젊은 해녀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주인공은 쟈민이다. 한국 남자와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정착하게 된 젊은 여성으로, 제겐 생소한 도시 울산에서 해녀 일을 막 시작한 참이다. 시작했다곤 해도 전혀 능숙하진 않으니 이제 막 해녀일을 배운 신참이라 해도 좋겠다. 해녀는 기량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눈다니 쟈민은 해녀 중에서도 하군에 속할 테다.
 
여느 이주여성이 그러하듯 쟈민도 한글학교를 다닌다. 그곳엔 지역의 다른 이주여성들도 와서 함께 수업을 받는다. 이 지역에선 해녀들도 제법 많은 모양. 쟈민 말고도 물질하는 달른 여성들이 있다.
 
어느 날인가. 학글학교에서 한 해녀가 돌고래를 봤다고 말한다. 돌고래를 봐야 진짜 해녀가 된다는 말이 있었던가. 그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쟈민이 그렇게 믿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날 이후, 쟈민은 돌고래를 보고야 말겠다고 결심한다. 상군 출신인 이에게 돌고래를 본 적 있느냐 묻고, 저도 돌고래를 보기 위해 더 오래 더 깊이 잠수하고는 한다.
 
영화는 돌고래를 보기 위해 노력하는 쟈민의 모습 한편으로, 그녀가 시어머니 순옥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모습도 담아낸다. 쟈민의 일상에 남편은 부재하다. 전쟁과 징집으로 쓸려나간 남성들 뒤로 어떻게든 삶을 꾸려내려는 제주 여성들의 분투가 오늘의 해녀 문화의 뿌리를 이루지 않았던가. 쟈민의 남편 또한 원양어업에 종사하는 이처럼 묘사되는데, 멀리 나가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집에 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쟈민에게 주어진 삶이란 남편이 없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시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그녀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해녀일을 배우는 것이 제게 허락된 전부일 테다. 문화가 완전히 다른 먼 타지, 소통조차 쉽지 않은 곳에서 어떻게든 적응하는 일이 결코 녹록하지 않으리라.
     
한국사회에 녹아들려는 이주노동자의 소망
 
 
숨비소리 스틸컷

▲ 숨비소리 스틸컷 ⓒ SIEFF

 
국제결혼한 이주여성의 외로움이 다른 이와의 유대로써 조금씩 풀어지는 모습을 <숨비소리>가 주목한다. 돌고래를 보겠다는 건 새로운 자리에 녹아들겠다는 결혼이주여성의 기대이자 소망을 상징하는 일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숨비소리는 얼마나 오래 참은 뒤에야 내뱉어지는 고단하고 간절한 소리일까.
 
돌고래를 보고 숨비소리를 제대로 내뱉는 해녀가 되기까지 겪어야 하는 무게가 보통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그를 이루어야 쟈민은 상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도 대신 해줄 수는 없는 과정, 그러나 손을 잡고 등을 토닥여 줄 수는 있다는 걸 이 영화가 내보이려 든다.
 
서툰 수준을 넘어 심각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연기가 아쉬운 작품이다. 대사소화의 문제를 넘어 주조연의 감정표현에서도 어색한 장면이 곳곳에서 노출된다. 연기 경험 없는 일반인 배우를 쓴 영화가 모두 이 같은 문제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서투른 연출과 연기지도가 영향을 미쳤으리라 여긴다.
 
그럼에도 <숨비소리>엔 무시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그건 결혼이주여성의 감정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제대로 담아내려 든다는 점이다. 꾸준히 늘어가는 결혼이주여성, 나아가 한국을 새 삶의 터전으로 꾸려가는 이주노동자들의 마음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일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이와 같은 작품이 일깨운다. 바로 이와 같은 점만으로도 <숨비소리>는 관심을 기울여 봄직한 작품일 수 있겠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포스터

▲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포스터 ⓒ SIEFF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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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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