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경험과 통찰력을 얻었고, 경험과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사랑에 빠진 젊은 여배우를 제외하곤 누구든, 일상생활을 무대에 올려놓는 것은 모순이며 불경한 짓임을 알았다. 그것은 무대가 일상을 한 차원 승화시키기보다 일상이 무대를 한 차원 끌어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이다. -이자크 디네센, '템페스트' 중에서
 
추락의 해부 포스터

▲ 추락의 해부 포스터 ⓒ 무주산골영화제

   

추락은 해부해본대도 추락이다. 전과 후가 같다면 해부에는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해부의 대상에 변화를 주는 것이 해부의 목적이 아니다. 해부하는 주체의 이해를 넓히는 것이 목적이다. 법의학적 해부는 사건을 둘러싼 진상을 가리는 걸 목표로 한다. 사체에 남겨진 단서를 살펴 사망의 원인을 추론하는 일, 그로써 사람의 권리가 억울하게 침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법의학적 해부가 된다.
 
<추락의 해부>(원제: <Anatomy of a Fall>)는 제목 그대로 추락을 해부한다. 추락한 건 작가를 꿈꾸는 남성 사무엘(사무엘 테이스 분)이다. 프랑스 산골에서 아내 산드라(산드라 휠러 분), 아들 다니엘(말로 마차도 그라너 분)과 함께 살아가던 그가 제 집에서 추락해 숨진 채 발견된다. 처음 현장을 발견한 건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 다니엘과 그의 안내견이다. 다니엘이 지른 비명을 듣고 나온 산드라는 한순간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돼 형사재판에 서게 된다.
 
영화는 유명 작가인 산드라가 남편 사무엘을 죽인 유력 용의자가 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을 다룬다. 글을 쓰고 싶지만 잘 풀리지 않았던 사무엘과 남편보다 훨씬 잘 나가는 산드라의 관계가 매스컴에서 다뤄지며 사건은 국민적 관심을 받기에 이른다. 사건을 해결하려는 공판검사의 집요한 추궁 가운데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던 결혼생활이 차츰 드러나며 사건은 점점 더 꼬여나가기 시작한다.
 
추락의 해부 스틸컷

▲ 추락의 해부 스틸컷 ⓒ 무주산골영화제

 
추락, 그리고 죽음을 해부하다
 
특히 사무엘이 죽기 전 날 두 사람이 첨예하게 다퉜다는 사실이 그가 직접 녹음한 파일을 통해 확인되며 산드라는 무죄방면을 자신할 수 없게 된다. 녹음파일 속에서 사무엘은 부당한 가사노동 분배는 물론, 일상의 모든 것이 산드라에게 맞춰져 있다고 비난한다. 그는 저도 글을 쓰고 싶다며 저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 글은 쓰면 될 일이지 저는 한 차례도 그에게 부당한 노동을 강요한 적 없다는 산드라의 말에 사무엘은 그야말로 폭발한다.
 
급기야 과거 자신이 쓰려 한 소재를 산드라가 사실상 표절했다는 이야기까지 터져 나오니 판사는 물론 배심원단과 청중들의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이들의 대화는 마침내 폭력으로 마무리되고, 다음날 사무엘의 죽음에 산드라가 엮여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머리를 쳐든다.
 
산드라와 사무엘이 둘 다 소설가를 꿈꿨다는 사실이, 산드라가 자신의 일상을 소설 가운데 녹여내는 방식으로 작품을 써왔다는 사실이, 글이 잘 풀리지 않는 사무엘이 아내의 노하우를 받아들여 일상을 녹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작품 가운데 드리워진 비극성을 일깨운다. 글머리에 적었듯 일상을 작품 가운데 무분별하게 올리기 시작하면 삶과 창작의 경계가 무뎌지고 삶과 작품 가운데 어느 하나쯤, 때로는 둘 모두가 무너지기 쉽다는 사실을 익히 많은 이들이 경고해왔던 것이다.
 
추락의 해부 스틸컷

▲ 추락의 해부 스틸컷 ⓒ 무주산골영화제

 
의문사 파헤친 152분의 법정드라마
 
그러나 이들은 소재의 고갈 때문인지, 창작력의 한계 때문인지 이를 혼동하고 마침내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는 한 명은 죽고 다른 한 명은 재판정에 서게 되었던 일이다. 그리하여 남은 것은 전 국민의 매서운 눈초리 앞에서 아내가 남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지를 가리는 이 민망하고 폭력적인 재판뿐이다.
 
<추락의 해부>로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쥔 쥐스틴 트리에는 해부할수록 앎과 진실 사이 놓인 벽이 굳건하게 느껴지는 상황의 부조리함을 영리하게 포착해낸다. 여기서 해부는 말 그대로의 해부가 아닌, 진실을 향하여 따지고 파고드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형사재판 가운데 산드라를 몰아세우는 검사와 검찰 측 증인들의 노력과 이를 통하여 문제를 직시하길 원하는 재판장과 배심원들, 또 한 걸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아들 다니엘과 청중, 그리고 관객 모두가 나름대로의 메스를 들고서 사건을 해부한다.
 
추락의 해부 스틸컷

▲ 추락의 해부 스틸컷 ⓒ 무주산골영화제

 
파면 팔수록 모호해지는 진실
 
사무엘이 죽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는 제 집 3층에서 추락하여 눈밭에 떨어져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기까지 어떤 심경에 놓여 있었는지, 또 산드라와는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그것이 살해인지 자살인지를 우리는 끝끝내 알 수가 없다.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한 걸음 떨어져 보기에도 헛되고 무리한 추론이 범람할 때는 청중이 방청석을 가득 메우더니, 막상 중요한 변론이 오갈 때는 관심이 얼마 답지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영화는 진실과 진실로 믿어지는 것과 우리가 진실이길 원하는 것들 사이를 오가며 인간이 진정으로 진실에 닿을 수 있는지를 또한 묻는다. 사무엘의 죽음은 어느 순간엔 타살이었다가, 어느 순간엔 자살이며, 또 어느 순간에는 그 사이 어느 지점에 놓여진다. 아들인 다니엘의 결정적 증언은 배심원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배심원을 넘어 상당수 관객들도 저처럼 한 걸음 떨어져 재판을 지켜본 그에게 그 어수룩한 유대와 신뢰에 근거하여 제 판단을 내맡길 준비가 되어있는 듯도 하다.
 
그러나 영화는 다니엘의 복잡미묘한 감정연기와 그를 끝까지 위태롭게 잡아내는 연출을 통하여 그 진술의 진위마저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다. 인간은 언제나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의 대상이 본인일 때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승리 뒤 변호인들 앞에서 기쁨을 표출하다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는 산드라의 모습처럼, 그저 우정을 넘어 어떠한 애정을 내보이는 그녀의 태도처럼, 어쩌면 누구도 다른 누구를, 사건을,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주산골영화제 포스터

▲ 무주산골영화제 포스터 ⓒ 무주산골영화제

 
언제나 그러하듯, 결론은 관객과 독자의 몫
 
눈이 보이지 않는 다니엘이 눈 뜬 다른 이들보다 더 진실에 가까이 다가선 듯 보이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눈은 진실처럼 보이는 진실 아닌 것들이 쉽게 마음을 빼앗기고,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을 진실처럼 여기도록 스스로를 현혹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정보가 인간을 진실로 이끄는 게 아니다. 추락은 아무리 해부해 보아도 추락일 뿐이란 것을, 진실은 해부로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 영화는 이야기한다.
 
답은 추락에 있는 게 아니다. 해부에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사건을 바라보는 개개인 각자가 사건의 진위를 정한다. 그것이 진짜 진실이고 진짜 거짓이 아닐 수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또 추락과 해부와 그 사실을 전하는 이들에게 결정권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쯤 더 편해질지 모를 일이다.
 
쥐스틴 트리에는 <추락의 해부>의 결말을 관객 앞에 놓아둔다. 영화의 결론은 오롯이 관객의 마음에 달렸다. 그 추락은 철저히 해부되었으나 당신이 결론을 내리기까지 여전히 결론지어지지 못하였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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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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