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이 몰락한다. 지역이 소멸한다. 지역이 죽어간다.
 
그저 구호가 아니다. 산업과 인구, 재정과 문화, 교육과 의료,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지역은 급속도로 쇠락하고 있다. 한때 농촌과 주변 소도시를 흡수하며 지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많은 도시들, 심지어는 광역시까지도 미래를 걱정하는 지경에 들어섰다. 인재가, 청년이 유출되고 경제가 무너지며 부담만이 늘어가는 지역의 모습을 곳곳에서 마주한다.
 
지방정부에서 뛰어난 인재가 배출되는 미국과 유럽의 사례를 한국에선 전혀 보지 못한다. 전문가를 채용할 수 있는 역량도, 권한도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앙정부가 내건 복지정책의 부담을 지방정부가 지는 구조다 보니, 재정운용의 자율성 또한 없다. 지방정부간 정책 경쟁이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이다. 민간 영역에선 격차가 더욱 두드러질 밖에 없다.
 
지방은 중앙의 식민지가 되거나 소외되어 몰락하는 운명뿐일까. 절망이 흩뿌려진 가운데 희망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나날이다.
 
지역영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너에게 닿기를 스틸컷

▲ 너에게 닿기를 스틸컷 ⓒ JIFF

 
영화는 현실에 바탕을 둔 예술이다. 직관적이고 대중적인 특질로 인해 선전, 선동의 도구로 쓰였을 만큼 다른 예술 분과보다 현실과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예술이, 또 영화가 인간을 움직여낼 수 있다면, 그로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면, 지방의 소멸 앞에 맡을 수 있는 역할 또한 있을 것이다.
 
지역영화는 지역의 생존에, 나아가 부흥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세상 많은 것이 그러하듯 믿음은 변화의 시작이다. 지역영화의 역할과 가능성을 믿는 이들이 지역영화를 이야기한다. 적지 않은 영화제가 지역영화인과 지역영화를 대상으로 지역공모를 따로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J 비전상'을 수상한 <너에게 닿기를>은 1993년생 젊은 감독 오재욱의 단편이다. J 비전상은 지역공모로 선정된 상영작 가운데 1편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전북지역 제작자나 감독, 또 전체의 절반 이상을 전북에서 촬영한 작품 가운데 경쟁이 이뤄진다. 올해는 47편의 작품이 출품돼 5편이 선정, 그중 <너에게 닿기를>이 영광을 안았다.
 
청각장애 급우 찾아나선 비장애 친구들
 
너에게 닿기를 스틸컷

▲ 너에게 닿기를 스틸컷 ⓒ JIFF

 
'한국단편경쟁 6'에 묶여 상영된 <너에게 닿기를>은 고등학교 학생들 간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20분짜리 짤막한 단편은 세 학생이 청각장애가 있는 급우 주연의 집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반장인 수진이 동급생 둘과 함께한다. 이들은 같은 반 학생들이 쓴 편지를 잔뜩 챙겨 길을 떠난다.
 
수진은 주연에게 이야기를 건네기 위해 직접 수어로 된 문장까지 연습한 모양이다. 내용은 사과의 말인데, 주연이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집에 있는 게 수진의 잘못 때문인 탓이다. 수진이 의도치 않게 주연을 다치게 한 것인데, 수진은 그것이 혹여 장애학생에 대한 학교폭력으로 비화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학폭이 무서운 세상, 혹여 대학 진학에 장애라도 될지 누가 안다는 말인가.
 
수진의 기대와는 별개로 주연은 친구들의 방문을 반기지 않는다. 수진의 사과 또한 제대로 받지 않는다. 집을 찾은 친구들은 실망하지만 소통이 원활치 않아 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수진은 쉽게 돌아서지 못한다. 그저 선생님의 지시로 주연을 찾은 이와 달리 제겐 그녀를 다치게 한 책임도, 이를 해결해야 할 동기도 있지 않던가. 수진은 다시 올라가 주연을 설득하려 한다.
 
영화는 이 나이 또래에 흔히 있을 수 있는 화해와 성장의 모습을 잡는다. 그저 십대의 성장기에 그치지 않고 장애, 즉 좀처럼 주목받을 일 없던 장애를 가진 학생의 관계맺음을 펼쳐낸 과정이 인상적이다.
 
가만 놔두면 고립되는 장애의 특성
 
너에게 닿기를 스틸컷

▲ 너에게 닿기를 스틸컷 ⓒ JIFF

 
수진 역을 맡은 배우 김나현은 GV 자리에서 "수어 연기를 처음 해봤다"며 "수어는 제가 연기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실제로 수어를 하며 제 표정이 굳어있었는데, 수어를 하게 되면 제가 표정을 움직이지 않더라"고 말했다. 수어를 하면서도 표정은 굳어 있는 비장애인의 모습, 영화에 쓰인 설정이 그저 설정만은 아닌 것이다.
 
주연을 연기한 홍아연은 실제 청각장애인이기도 하다. 그녀는 "연기를 배운 적이 없어서 처음 참여하게 됐을 때 되게 고민했다"며 "영화에 보여지는 내 모습이 어떨까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학교에서 다툼이 있고 상처를 받는 게 실제 있는 일이고, 오해를 해소하는 과정을 잘 전달해보고 싶었다"며 "많이 배웠고 앞으로도 더 분발하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장애는 가만히 놓아두면 스스로 고립되는 습성을 가졌다. 스스로 위축되어 저를 집 안에 가둘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좋은 직업을 얻기 어려워 중앙에서 지방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로부터 장애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이 탄생한다. 보이지 않고 접할 수 없으니 이해할 기회 또한 갖지 못하는 것이다. 뒤엉켜 부딪쳐야 이해하고 화합할 수 있다.
 
돌아보면 서글픈 장애의 지역성
 
등록 장애인 수만 지난해 기준으로 264만 명, 한국 총 인구 5175만 명 가운데 5%를 차지한다. 영화에 등장한 청각장애인은 전체 장애인구 가운데 13%가량, 34만 명 정도다. 그러나 그들은 그 수에 비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들이 고립돼 있다는 증거다. 국가는 그들의 고립과 관련한 통계조차 충실히 작성해 접근성 있게 관리하지 않는다.
 
지방으로 갈수록 장애인구가 늘어난다는 점도 주목해 마땅하다. 전라북도만 해도 인구수 175만 명 가운데 13만 명이 장애인구로 등록돼 있다. 무려 7%를 넘는다. 반면 서울은 장애인구가 38만 명에 그친다. 인구수 대비 4%가량이다. 유의미한 차이임에도 정부는 물론 주목하는 언론조차 없다는 사실이 참담할 지경이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코리안시네마 부문에 초청돼 작품을 상영했던 오재욱 감독은 올해엔 한국단편경쟁 부문에 작품을 출품해 지역공모로 당선, 수상까지 하는 영광을 안았다. 지역 영화인으로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는 한편, 장애라는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관객에게 장애인이 노출되는 일상적 갈등의 형태를 소개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모에 응한 여러 작품 가운데 <너에게 닿기를>을 초청한 것도, 이 작품에 상을 안긴 것도 이러한 연유 때문일 테다.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JIFF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 JIFF 너에게닿기를 오재욱 김성호의씨네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