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킹: 헨리 5세>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02.
이 영화의 기본적인 뼈대가 되는 것은 역시 왕자 할의 성장 서사다. 왕가의 책무를 뒤로한 채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던 할이 갑작스럽게 왕의 자리에 올라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선(善)'이다. 폭압과 폭정으로 일관했던 자신의 아버지와 달리 할은 다른 방식, 덕과 선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그것을 방해하는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기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기존 권력 집단과의 갈등은 물론, 스스로 역시도 상황에 집어삼켜져 원래의 뜻을 잃어버리게 되기 십상이다. 부왕과 기존의 리더들과 확실한 차별화를 원하는 할이지만, 그 뜻과 기준을 마지막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하는 것이 그의 성장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점이 된다.
그의 곁에 머무르는 팔스타프(조엘 에저튼 분)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하다. 평소에는 떠들썩하고 향락을 좋아하는, 가볍게 보일 지 모르는 그이지만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왕에게 직언을 하지 않는 충직하고 정직한 인물이다. 그는 기존 권력 집단과 완전히 반대의 지점에서 때때로 흔들리고 조급해하는 왕자 할을 '선'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전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할과 달리, 과거에 숱한 전쟁터를 지나며 그 참혹함을 몸소 느낀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는 추구하는 바는 동일하더라도(그 역시 할과 함께 전쟁을 반대하는 쪽의 인물이다) 그 원인이나 의도는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 책임이라는 것의 무게를 정확히 이해하는 인물이 되어 왕의 성장 서사에 조력자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영화의 도입부에는 폭정과 폭압처럼 보였던 국왕 '헨리 4세'(벤 멘델슨 분)의 모습이, 점점 이해가능한 영역으로 옮겨가는 지점도 이 작품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영화에서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할은 윌리엄(숀 해리스 분)의 계략과 의도에 의해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교활한 이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수십 년을 살아왔을 선왕 헨리 4세의 삶이 떠오른다. 발 밑에 쌓이는 수많은 신하들의 요구를 제어하며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의 무게가 할에게도 주어지는 순간에 말이다.
03.
성장 서사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것은 프랑스 침공과 더불어 아쟁쿠르 전투다. 프랑스 왕세자 도팽(로버트 패틴슨 분)은 할의 즉위를 축하하는 선물로 무례한 짓을 저지른다. 또 프랑스의 찰스 왕(티보 드몽따르베르 분)으로부터 영국 왕을 살해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암살자가 등장한다. 이는 영화에서 영국이 프랑스를 침공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 다양한 정치적 상황과 이유가 발단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데이비드 미쇼 감독은 영화에서 이 지점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한다. 할의 성장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이를 통해 영화에서는 대외적으로 왕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한다. 과거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집단을 포섭하고 내부를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할 개인적으로는 내면의 변화를 겪게 되는 계기가 된다. 무조건적으로 '선'을 택하고자 했던 자신의 뜻과 달리 왕이라는 위치에서는 그럴 수 없는 순간도 있다. 이를 깨달은 할은 선택의 무게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이해해 간다. 하나의 선택만이 주어질 때는 가벼울 지도 모르지만, 그 선택이 또 다른 선택을 낳고 그 결과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지고 나면 그 이후의 일은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되어버리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과 달리, 자신의 결정으로 인한 가까운 사람의 죽음. 팔스타프를 잃고 난 뒤 할은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복잡한 상태가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