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가 그친 후>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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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가 그친 후>는 클래식한 드라마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듯한 작품이다. 어떤 변주도 없이 두 사람이 만나 관계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기존의 공식대로 풀어나간다. 불완전한 상태에 놓인 이들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감정을 형성해 가는 것. 그 동안 우리가 흔하게 만나왔던 사랑과 엇갈림의 모습이다. 다만 여기에 변수가 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이제까지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두 사람의 관계가 명확히 형성되기 이전에 '기억의 상실'이라는 사건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애틋한 심상의 극대화를 위해 위기의 발생을 관계의 최고조, 정점에 두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와 같은 설정은 유사한 흐름과 흔한 소재로 극을 이끌어가고는 있지만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단지 애틋한 감정만은 아니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만든다. 약간의 비틀린 설정을 통해 변주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완전히 친한 관계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히 타인의 관계도 아닌, 상당히 애매한 거리에서 여자의 사건에 관여하게 된 남자는 이 상황을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함께 엮으며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2주만에 깨어난 코요미가 어제의 기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더욱 말이다. 인지상정의 마음으로 오갈 데 없는 그녀에게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내자고 제안하는 남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다음날이면 자신이 왜 유키스케의 집에서 잤는지 기억할 수 없는 여자. 두 사람의 애매한 관계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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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이 작품은 사건 그 자체보다 관계의 본질에 대해 들여다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처음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의 관계라는 것은 타인의 기억에 의해 존재가 유의미한 뒤에야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아담 샌들러 주연의 <첫 키스만 50번째>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다루어진 바 있다. 루시(드류 베리모어 분)의 단기 기억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나카가와 류타로 감독이 이번 작품 속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 역시 유사한 지점에 있다. 다만,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관계와 기억의 고리는 조금 더 진지하고 무거운 톤으로 형성된다.
매일 아침 현재의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유키스케와 그의 설명에 의존해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코요미에게 상대에 대한 정보의 불균형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에 대한 내용부터 코요미는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아침을 맞이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코요미에게는 매일이 새로운 기억인 것과 달리 그녀의 새로운 매일들이 유키스케에게는 축적되어 간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시작할 때 서로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로 시작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차이는 대단히 중요한 설정이다.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감정을 쌓아나가는 것이 관계라고 한다면, 이 관계는 애초에 영원히 일방적일 수 밖에 없도록 설정된 것이나 다름 없는 것 아닌가.
또한, 코요미 본인의 의지로 인해 보여준 것이 아니라, 당사자는 기억을 잃어버리는 상황에서 타자인 유키스케가 선택적으로 코요미의 정보를 취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한 사람에게도 수백, 수천 가지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말이다. A라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 나름대로 판단된 나의 세상이 있을 것이고, B라는 사람에게도 그 나름대로 형성된 나의 세상이 있겠지만, 둘 모두 진짜 나의 세상과 모습이 동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키스케가 코요미의 모습을 쌓아간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이 진짜 코요미의 전부를 아는 행위로 귀결될 수 있는 지는 또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