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빛내는 또 다른 주역을 찾습니다. 연기하는 배우라는 점에서 '주'와 '조'는 따로 없습니다. 혹시 연기는 잘하는데 그동안 이름을 잘 몰랐다고요? 가만 보니 이 사람 확 뜰 것 같다고요? 자신의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온 이들을 <오마이스타>가 직접 '픽업'합니다. [편집자말] |
▲ 영화 <범죄도시>에서 조선족 흑룡파 위성락 역으로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진선규 ⓒ 이희훈
▲ 인생 첫 빡빡머리로 연기 인생 반전한 배우 진선규 ⓒ 김혜주
"지금 (머릿속이) 백지인데 빨리 얘기하고 싶은데...."
이 말에 객석에선 '천천히 해요'라는 말이 들렸다. 지난 38회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진선규는 그렇게 3분이 넘는 시간동안 눈물을 쏟으며 고마움을 느낀 사람들 이름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말했다.
여운은 여전했다. 14년 연기 경력에 영화로 받은 첫 상, 얼마나 할 말이 많았을까. 그의 진심이 전달된 듯 대학로에서 진선규와 함께 동고동락하던 동료들도 당시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눈물 흘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일 서울 홍대입구 인근에 있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그를 만났다. 영화 <범죄도시> 속 흑룡파 위성락은 온 데 간 데 없고, 차분하면서도 선한 목소리가 스튜디오를 울렸다. "수상 이후 기사는 꼼꼼히 찾아봤는데 너무 지질하게 운 것 같아서 영상은 차마 볼 생각을 못하고 있다"고 그가 수상 이후의 소회부터 전했다.
저 멀리 우주에 있는 좋은 배우
마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심혜진씨가 진선규의 동창이라며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한 글을 보낸 터였다. "안 그래도 오늘 인터뷰에 그 친구가 혹시 나오는지 궁금했다"며 "진선규는 동창들 덕에 그때 사진을 찾아보고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청룡상 최대 스타? 30년 전 '까불이' 진선규를 기억한다 http://omn.kr/oowj )
그의 수상소감 마지막 말을 묻고 싶었다. 수상 무대에서 내려오기 직전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저 멀리 우주에 있는 좋은 배우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배우가 되겠다"고 했다. 마치 주문을 걸 듯 다짐처럼 들린 이 말의 참뜻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배우들이 그렇겠지만 좋은 배우가 되고 싶잖나. 과연 '좋은 배우'라는 종착지라는 게 있을까? 우리나라 최고의 선배들도 계속 고민하고 싸우는 과정인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닿을 수 없는) 우주에 좋은 배우라는 목표가 있는데 그곳으로 계속 가고 있는 배우였으면 좋겠다하는. '나 결국 됐어!' 이런 느낌은 별로인 것 같다. 과정을 잘 밟아 가면 언젠가 인정해주실 것이라는 게 제 삶의 가치관이었다. 다만, 잘 가고 있는지는 수시로 체크해야지."
2004년 친구들과 극단 '공연배달 서비스 간다'를 만든 이후 그는 꾸준히 달렸다. 무대에서 어느새 몸을 잘 쓰는 배우로 소문이 났고, <칠수와 만수> 같은 문제작을 비롯해 <김종욱 찾기>의 멀티맨 같이 젊은이들의 취향을 반영한 트렌디 작품도 경험했다. 무대 작품만 서른 편이 훌쩍 넘은 진선규가 말한 '체크'는 관객의 호응도가 아니었다. "연기를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나 혹은 관객 분들이 아닌 동료들이 결정하는 것이더라"며 그는 "동료들에게 인정받고 있는지가 중요했고, 동료들에게 우리 아직 늦지 않았다는 걸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떨어졌던 <범죄도시> 오디션
사실 <범죄도시>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인생작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그저 역할을 따내고 싶었다. '알려진 배우보다는 잘하는 배우'를 뽑고자 했던 강윤성 감독의 생각에 그 역시 1200명 넘게 본 오디션의 응시자로 갔으나 탈락했다. 악한 위성락의 모습과 다른 그의 선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위성락은) 마음속으론 제가 해왔던 작품과 다른 역이라 너무 하고 싶었고, 욕심 아닌 욕심이 있었다. 근데 떨어졌지. 몇몇 스태프 분들의 요청으로 오디션을 한 번 더 보게 됐다. 그리고 하게 된 것이다. 촬영 직전까지도 너무 이미지가 안 나와서 스스로도 압박이 컸다. '머리 빡빡 깎아볼게요'라고 제안했고, 성공한 거지. 작품에서 스포츠머리를 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깎은 건 처음이었다. 40년 만에 제 안에 이런 이미지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웃음).
촬영 전 한 달 반 이상을 윤계상(흑룡파 장첸 역), 김성규(흑룡파 양태 역)와 합숙했다. 리허설하고 대사 맞추고, 결국 모든 장면을 촬영 전까지 다 맞췄다. 만나면 동선 만들어 보고, 술 마시고. 또 다음날 만나서 사투리 연습하고 술 마시고. 계상이가 자기 분량을 나눠주면서 하나의 팀이 됐다. 각자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연습이 돼 있으니 감독님이 현장에서 새로운 걸 주문해도 30분 안에 되더라. 영화도 연극을 준비하듯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북한군, 기자, 회사 대리 등 진선규는 영화 속에서 특별한 이름 없이 스쳐가는 단역이었다. 그러다 <사냥> 때 어엿한 배역 이름을 가졌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때까진 누구와 연습하는 게 아닌 그저 제 분량만 잘 준비해 가는 정도였다"며 그는 "공동창작의 느낌이 들지 않았기에 <범죄도시>에서의 경험이 너무 제겐 소중하다"고 강조했다.
"그만큼 연기적으로 갈망이 쌓여 왔다. 뭔가를 하고 싶은데 그걸 하기엔 역할이 그렇지 않고. 뭔가를 하려 하면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돼' 이런 말을 듣기도 했다. 뭐랄까 배우로서 자괴감이 들던 때였다. 연극은 참 재밌었는데 (영화는) 좀 재미가 없다랄까. 근데… 포기할 수 없었던 게 <개들의 전쟁>이라고 제 첫 장편에서의 기억 때문이었다. 그때 짜릿함을 느꼈다. 그리고 <범죄도시>로 5년 만에 그 짜릿함을 다시 맛 본 셈이지."
버티다
이 지점에서 진선규는 두려움을 언급했다. 대학로에서 지낸 10여 년을 돌아보며 그는 처음 배우라는 걸 마음에 품기 시작한 계기를 언급했다. 경남 진해 고등학교 3학년이던 당시 그는 한 극단에 놀러 가서 본 풍경을 한 장의 사진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딱 배우를 해야겠다가 아니라 그땐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서 즐겁게 노는 게 좋다' 이런 마음이었다. 나이도 많고 아르바이트 하며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더라. '나도 거기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학을 가야 하는데 연극영화과라는 게 있다더라. 그렇게 수능 보기 3개월 전에 방향을 정했다. 극단 분들에게 조언을 듣고 준비해서 한예종 시험을 봤는데 정말, 운 좋게 붙었다. 대학교에 가서도 연기보단 선배들과 놀고 재밌게 지내는 게 좋았다. 그러다가 대학로 공연을 하면서 이걸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진짜 연기를 못했다. 몸을 잘 쓴다는 말은 들었는데 여기서 10년 버티니까 연기도 곧잘 한다고 소문이 난 것 같다. 영화 쪽으로 와서도 '진선규는 믿고 볼 수 있는 배우'라는 말을 듣기 위해 그 정도 버티려고 한다. 이제 조금씩 알려지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 겁이 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진선규는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의심했던 적이 없었다"고 망설임 없이 고백했다. '전혀'라는 표현을 써 가면서 그는 자신 보다 앞서나간 동료 배우들을 소개했다.
"제 극단 동료들 중 저보다 영화를 먼저 한 이희준, 김민재 같은 친구들도 '나 연예인이야' 이러지 않고 같이 와서 공부하고 공연하고 그러니까 '그래 좋은 배우에 대해 고민하고 준비하면 언젠간 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힘든 건 누구나 마찬가지잖나. 다행히 제겐 그걸 이길 만한 즐거움이 있었다. 제가 좋아하는 걸 하는데 그것에 대해 책임을 안 질 수 없었다. 작품을 할 때마다 뭔가 하나씩 무장하는 느낌, 뭐 하나씩 장전하는 기분으로 임했다."
함께 연기하는 동료 그리고 아내이자 배우 박보경, 두 자녀가 그의 삶의 동력이었다. "아내가 (연기에 대해) 쓴 소리도 하고 가장 무서운 모니터"라며 "아내가 공연 보러 올 때가 가장 무섭다"고 웃으며 말했다.
가위손
연극 <신인류의 백분토론>을 비롯해 영화 <특별시민>,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남한산성>, <꾼>, <범죄도시> 등 올해 바쁘게 달렸던 진선규다. 현재도 드라마와 영화 촬영을 번갈아 하고 있다. 그는 최근 극단에 공연을 잠시 쉬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나름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극단에서 창작 작업은 병행할 거다. 다만 무대 공연을 쉬겠다고 말했다. 연극 무대에선 제가 알려졌는데 영화 쪽에선 그간 절 아무도 몰랐다. 그러다 보니 어떤 존중을 받기 보단 그냥 잠깐 촬영하고 다시 연극 무대로 갈 사람이라고 (영화계에서) 생각하시는 것 같더라. 영화에 출연하다가도 자괴감을 느끼며 연극 무대에 서곤 했다. (무대에) 적을 두고 있으니 뭔가에 상심하면 이쪽에서 위로를 얻으려고 하는 날 발견했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루저 같은 느낌?
10년을 지나며 연극 무대에서 제 존재감을 알린 건데 (영화계에서) 승부를 보자고 생각했다. 무조건 버티고 하자. 그렇게 마음먹고 달려왔다.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10년 보단 좀 더 빨리 당겨지긴 했다."
그는 영화 <가위손>에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빗댔다. 뭔가 무서워 보이고 낯설어 보이지만 다가가면 따뜻하고 아름다운 존재. 연기와 극단이 그에겐 그런 존재이자 공간이었다.
"이 영화가 제 인생의 복선 같다. 배우에 대한 꿈을 키우기도 전인 어렸을 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위손>을 비디오 가게에서 계속 빌려보곤 했다. 뭐가 그리 좋았는지 제 정서만이 알고 있겠지. 안 그래도 조만간 시간 내서 다시 보려고 한다.
대부분 힘든 시절을 지나오셨겠지만 저 역시 먹고 살기 힘들 때였고, 저희 부모님도 그렇게 어렵게 살아오셨다. 그러다보니 따뜻함이 간절했던 것 같다. (진해의) 작은 극단에서도, 대학 때에도, 또 10년째 하는 극단에서도 따뜻함을 느끼고 있다."
"정말 됩니다!" 인터뷰 말미 진선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기자에게 말했다. 스스로 증명해 낸 결과라 그만큼 그 말이 묵직했다. 마침 인터뷰 당일 저녁 "대학로 동료들과 만난다"며 "못다 한 얘길 하고 싶다"고 환히 웃었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 |
수 십 편이 넘는 무대 공연과 영화 출연작 중 그에게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작품을 물었다. 안 아픈 손가락은 없겠지만 연기적으로 그리고 삶에 있어서 작게나마 전환점이 된 작품을 꼽아달라는 의미였다. 그는 앞서 언급한 영화 <개들의 전쟁>과 연극 <나와 할아버지>, <뜨거운 여름>을 짚었다.
"<개들의 전쟁>은 제게 영화 촬영이 짜릿하다는 걸 처음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그리고 <나와 할아버지>는 연기라는 게 모두 상상해서 하는 것이지만 그 인물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해줬다. 제가 할아버지 역이었는데 그 사람의 생각과 사고를 쫒아가지 않으면 연기라는 게 정말 섣부를 수도 있구나 깨달았다.
<뜨거운 여름>은 정말 유년기부터 장년기까지 일대기를 쭉 연기한 건데 참 좋았다. 제목처럼 누구에게나 뜨거운 시절이 있었다는 걸 표현한 건데 그걸 하면서 난 지금 어떤 계절일까 돌아봤다. 초심을 다지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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