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빛내는 또 다른 주역을 찾습니다. 연기하는 배우라는 점에서 '주'와 '조'는 따로 없습니다. 혹시 연기는 잘하는데 그동안 이름을 잘 몰랐다고요? 가만 보니 이 사람 확 뜰 것 같다고요? 자신의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온 이들을 <오마이스타>가 직접 '픽업'합니다. [편집자말]

 영화 <범죄도시> 속 배우 윤병희의 모습.

영화 <범죄도시> 속 배우 윤병희의 모습. ⓒ 홍필름


2007년 영화 <7급 공무원>으로 데뷔 후 20편이 넘는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웨이터, 사채꾼, 미결수, 교도관1, 병원환자1 등. 이름은 없었지만 배우 윤병희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 오디션 첫 합격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7급 공무원> 때였다.

"연극 오디션은 소극장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내 것을 보여줄 수 있었는데 영화 오디션은 제작사의 작은 사무실에서 보더라. 작은 방에 테이블이 놓여 있고 카메라를 통해 날 바라보시는데 기댈 곳이 없었다. 내 모든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 쌀국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는데 바쁜 와중에 전화가 오더라. 왠지 받아야 할 것 같아 받았더니 합격했다는 연락이었다. 사장님이 축하한다고 맛있는 쌀국수 한 그릇을 내주셨다(웃음)."

그때부터 카메라와 친해지려 했다. 이미 연극 무대에선 3년째 공연을 올리고 있던 그는 첫 영화 오디션 이후 절치부심했다. 이름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꾸준히 단역, 조연 캐릭터를 따냈다. 그리고 최근 흥행한 <범죄도시>에서 휘발유라는 배역으로 당당히 엔딩 크레딧의 한 줄을 채웠다. 휘발유가 누구냐고? 조선족 범죄자들의 일망타진을 노리는 마석도 형사(마동석)에게 주요 정보를 제공하고, 중국 공안으로 위장해 결정적 도움을 주는 바로 그 캐릭터다.

휘발유가 되기까지 

흥행도 흥행이지만 <범죄도시>는 그간 전면에 드러나지 않던 실력파 배우들을 대거 발탁, 운용의 미를 보인 작품이기도 하다. 진선규, 임형준, 허동원, 김구택 등 중견 조연으로 활약하던 이들이 주요 캐릭터를 고르게 맡았다. 이들을 뽑기 위해 강윤성 감독은 약 1000명이 넘는 배우들의 오디션을 진행했고, 윤병희도 그중 하나였다.

"자유연기와 지정연기를 보였다. <황해>에서 조선족 웨이터를 한 경험이 있고, <서부전선>에서 중공군 역을 해서 조선족 말투 연기를 준비해갔다. 오디션이 잡히는 순간 긴장과 압박의 연속이다. 이 분들이 날 원할까를 생각하며 그 지점을 정확히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 보고 나면 아쉽거나 후련하거나 둘 중 하난데 <범죄도시>는 그 중간 정도의 감정이 들더라. 

아니나 다를까 두 달 동안 연락이 없어 떨어졌구나 생각하던 차에 감독님이 직접 오디션 본다고 연락이 왔다. 감독님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감동받았습니다' 하시더라. 그냥 인사치레인 줄 알았다. 돌이켜보니 절 신뢰했다는 생각이 들어 진짜 감사하더라. 현장에서 배우들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셨다. 작은 역할임에도 스스럼없이 아이디어를 말씀드렸는데 본인 연락처를 주시며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 하시더라."

 이 조선족 콤비는 영화 속에서 마석도 형사의 부탁으로 장첸 일당에게 접근해 정보를 빼내고 교란도 시킨다. 우측이 배우 윤병희.

이 조선족 콤비는 영화 속에서 마석도 형사의 부탁으로 장첸 일당에게 접근해 정보를 빼내고 교란도 시킨다. 우측이 배우 윤병희. ⓒ 홍필름


그렇게 해서 윤병희는 장첸(윤계상) 조직을 교란시키고 정보를 빼내는 평범한 조선족 휘발유로 분할 수 있었다. 영화에 많은 분량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나름 그는 "마석도 형사의 따뜻함이 왠지 휘발유를 통해 비춰질 수 있을 거 같아 그런 면을 중심으로 톤을 잡아갔다"고 말했다. 유효한 분석이었다.

"마석도가 악당에겐 무서운 영웅이지만 일반 조선족들에겐 용돈도 쥐어주는 따뜻한 형사지 않나. 휘발유로서 마 형사를 오래 알고 지낸 형처럼 대했다. 이걸 또 마동석 형이 너무 잘 받아주셨다. 그래서 마음 편히 할 수 있었지. 그리고 중국어 좀 하는 한국 배우가 아닌 정말 중국인처럼 보이고 싶었다. 휘발유가 중국 공안으로 위장했을 때 치던 대사를 지금도 할 수 있다(웃음). 진짜 많이 연습했거든.

중국어 선생님에게 이런 상황과 대사에선 어떤 정서가 담겨있는지 하나하나 물었다. 대본 외적인 부분을 찾아보고 준비했던 거 같다. 이 말에선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마음일지 등. 이렇게 작품 외적으로 준비를 해가야 내 스스로 안심이 된다."

강한 확신

올해로 서른일곱인 그는 두 아이를 둔 가장이기도 하다. 14년의 연기 경력에 무대와 영화판을 전전해왔다. 주변의 걱정 어린 시선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확신에 찬 답을 했다. 작품이 없을 땐 각종 아르바이트와 단기 직장을 다닌다. 기자를 만났던 때도 그는 6살, 4살짜리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작은 쇼핑백 안에 담아 놓고 있었다. 

"신혼 때 배우와 가장으로서 잘해내야지 매우 강하게 다짐했던 적이 있다. 정작 그땐 1년에 두 번밖에 오디션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항상 난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가끔 내가 왜 이 길을 택했을까 생각할 때는 있지만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순간 그 생각이 들더라도 빨리 치워버린다. 가장으로서 이기적인 것 같지만 연기로 성공해야지, 다른 걸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한 거 같다. 

이제 겨우 바닥에서 한 걸음 뗀 단계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올라갈 계단이 매우 많은 거지. 사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교육자셨다. 제가 늦둥이에 외아들이라 어렸을 때 변호사나 법관이 되겠다고 말하면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셨다. 어른이 되면 그걸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생각이 커지면서 또 학업과 내가 멀어짐을 느꼈다. <교실 이데아>라는 작품을 중3때 봤고, 그 기억이 크게 남았다. 잊고 살다가 이왕이면 내가 하고 싶고 궁금한 걸 하자 생각한 게 바로 연기였다."

 영화 <범죄도시>.

영화 <범죄도시>. ⓒ 홍필름


호기심과 강한 확신으로 시작한 연기자의 길. 단역임에도 그는 작품마다 느꼈던 바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중 그는 네 작품을 언급했다.

"(영화계 많은 조연, 단역 분들이 모인) <범죄도시> 현장은 아는 분들이 가장 많았다. 그냥 촬영장 공기 자체가 편했다. 배우들 중 숫기 없는 분들이 참 많은데 저도 낯가림이 심한데도 그곳은 편했다. 특별한 대화가 오고가지 않아도 가벼운 인사를 하더라도 서로 힘을 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7급 공무원>은 영화 데뷔작이면서 어머니를 시사회에 모시고 갔던 첫 작품이었고, <황해>는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지만 사람들이 절 기억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서부전선>은 크레딧에 '조연'이라는 걸 처음 달아봐서 기억에 남는다(웃음)."

오디션 킬러

이 정도 경력이면 친한 제작사나 영화인들은 당연히 있는 법. 인맥으로 알음알음 작품에 참여할 수도 있지만 윤병희는 한사코 오디션을 보려 한다. "개인적으로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며 "아는 분이 제작하는 작품이라도 그 분 몰래 내 프로필을 넣은 후 오디션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지금은 스스로 증명하는 단계 같다. 내 입장에선 오디션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가장 큰 공부의 시간이다. 방금 전 오디션을 되새기면서 가는데 그게 묘하게 내게 맞아 떨어진다. 떨어지면 물론 후유증이 있지. 하지만 아쉽고 아프다는 건 그만큼 내가 열정적으로 준비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일희일비 하진 않으려 한다. 내가 못해서 떨어질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가끔 날 제대로 못 보여준 오디션이 있으면 그게 그렇게 괴롭더라. 윤병희를 보여주는 시간인데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날 힘들게 한다. 지금까지 두세 번 정도 있었는데 그 기억이 참 오래간다."

타인에게 처음 하는 얘기라며 윤병희는 자기 전 매일 떠올리는 주문 같은 말을 고백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행복한 배우가 되자'. "의식하든 안 하든 이 생각을 매일 하고 있더라"며 그 스스로도 놀라워했다.

앞으로 출격 대기 중인 작품이 꽤 있다. 드라마 <투깝스>, 영화 <곰탱이>와 <국가 부도의 날> 등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예정이다. 영화와 드라마로 입지를 키워가면서 동시에 그는 무대에 대한 애틋함도 드러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무대는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내가 엄청 좋아하는 선배가 계신데 약속했다. 행복한 이야기, 재밌는 이야기를 전하는 작품을 꼭 같이 무대에 올리자고. 막연한 약속이 되지 않게 내게 주어지는 걸 열심히 해야지. 어쨌든 배우는 쓰임을 받는 존재니까 찾아주시면 최선을 다해 임할 것이다." 

 배우 윤병희.

배우 윤병희. ⓒ 카라반이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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