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빛내는 또 다른 주역을 찾습니다. 연기하는 배우라는 점에서 '주'와 '조'는 따로 없습니다. 혹시 연기는 잘하는데 그동안 이름을 잘 몰랐다고요? 가만 보니 이 사람 확 뜰 것 같다고요? 자신의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온 이들을 <오마이스타>가 직접 '픽업'합니다. [편집자말] |
▲ 영화<밀정>에서 하시모토 역의 배우 엄태구. 실제 성격은 조용하면서도 낯을 가린다. 그럼에도 카메라 속 그는 여지없이 에너지를 발산한다. 대체 어떤 비결이 있을까. 그가 궁금했다. ⓒ 이정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울컥거림과 뭉클한 감정이 영화를 찍는 내내 그의 가슴에 차 있었다. 영화 <밀정>에서 일제의 앞잡이로 항일 독립군을 무자비하게 잡아야 했던 경찰 하시모토 역의 엄태구(33)다. 그 감정의 정체는 촬영을 위해 찾아간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 때문이었다.
시대의 아픔 속에서 잔인하게 스러져 간 당시 선열들을 떠올리며 엄태구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진짜로 하자, 진짜 악랄하게 하자". 독립운동가에 대한 존경이 커질수록 그는 더욱 철저히 일본 경찰 하시모토가 돼야했다. "그 연기를 잘 해내야 내가 임시정부 건물 앞에서 느꼈던 그 뜨거움이 관객에게 전해질 것 같아서"라며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처럼 외부에서 바라본 엄태구는 매 작품 자신을 치열하게 달구고 괴롭히는 배우다. 눈썰미가 좋은 영화광이라면 영화 <잉투기>와 <차이나타운> 속 엄태구를 기억할 것이다. 구겨진 자존심을 기어코 회복하려던 치기 어린 태식(<잉투기>)과 냉정한 현실 논리를 몸으로 습득해 버린 우곤(<차이나타운>) 모두 엄태구가 온 몸으로 파고들었던 캐릭터다. 관객들에게 그의 연기가 이름보다 각인되었고, <밀정>을 통해 그가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오마이스타>가 지난 6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픽업'했다.
6년만의 재회
▲ <밀정>에서 하시모토(엄태구 분)는 이정출(송강호 분)과 상당히 다른 인물이다. 둘 다 일본 경찰이지만 이정출이 동족을 죽인다는 자책감에 괴로워 하는 캐릭터라면 하시모토는 아무 거리낌 없이 임무를 수행한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베테랑>이나 <인간중독> 등 상업 영화 경험이 있다지만 여전히 엄태구는 상업영화 현장이 낯설다고 고백했다. 큰 키에 입을 꽉 다문 얼굴에선 결연함마저 느껴지지만 정작 마음속에선 온갖 내부 갈등이 촬영 직전이면 일어나기 때문. "촬영 전날이면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생각에 빠져 지내곤 했다"고 대뜸 그가 고백부터 했다.
그리고 만난 영화 <밀정>. 엄태구는 "이 작품이 제 밑거름이 될 것"이라 말했다. "철저하게 깨졌고, 그만큼 새롭게 채울 수 있었다"는 게 이유였는데 인터뷰 중 이 비슷한 말을 할 때마다 그는 몇 번 벅찬 감정을 추슬렀다.
"속으로만 갖고 있던 생각인데 오디션 당시 주변 의열단 대원과 하일수(영화에서 하시모토의 정보원) 대본이 있었다. 이정출은 송강호 선배가 할 걸 알고 있었고, 난 기대를 버리고 오디션을 봤다. 그간 경험인데 기대를 할수록 연기에 힘이 들어가고 잘 안 됐을 때의 실망감도 더 커지더라. 오디션 장에 김지운 감독님 혼자 계셨고, '<잉투기>를 잘 봤다'며 '어디서 많이 봤는데 그때 형사4역을 맡았었구나' 하시더라. 근데 갑자기 딸꾹질이 나서 숨을 참아가며 연기했다. 대본에 없던 캐릭터도 선보였다. 정말 해내고 싶었다."
자신의 전작 <악마를 보았다>(2010)에서 엄태구가 단역으로 출연한 사실을 뒤늦게 안 김지운 감독은 그런 엄태구에게 "잘 성장했구나"라는 짧은 한 마디를 던지고 하시모토로 낙점했다. 의열단에게 설득당해 흔들리는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 분)과 달리 철저하게 상대를 제압하는 인물이다. 사실 일본 앞잡이 역이 처음은 아니다. 공포영화 <기담>(2007)에서도 그는 짧지만 일본군으로 등장했다. 이 지점에서 엄태구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편집됐지만) 경무국장 히가시 대사 중 '아 맞다 자네도 조선인이지?'라고 묻는 장면이 있었다. '아닙니다! 어릴 때 귀화했기에 그때의 기억이 없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지운지 오랩니다!'라고 하시모토가 답한다. 이 한 마디 대사로도 수많은 전사(인물이 겪은 앞선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었다. 또 히가시가 하시모토 어깨에 손을 짚으며 '기대하는 바가 크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아! 진짜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마음이 쑥 올라왔다. 그 마음이랑 내가 김지운 감독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던 것과 통하더라.
대본을 받은 이후엔 도망하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정말 대단하신 송강호 선배와의 연기도 그렇고, 일본어 대사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기담> 때 그 일본어 대사 한 마디가 트라우마였다. 지금도 그 대사가 기억난다. (일본어로 대사를 읊으며) 이 간단한 걸 못 외워서 현장에서 그렇게 NG를 냈다.
당시 형이 연출부(엄태화 감독이 엄태구의 친형이다-기자 주)였는데 당황해하던 그 표정도 잊을 수 없다. 하도 틀려서 감독님이 밥 먹고 하자고 했는데 난 밥을 거르면서 일본군복을 입고 현장을 돌아다니며 대사를 중얼거렸다. 주변을 지나던 관광객이 제 모습을 보시곤 무장 공비인 줄 알고 기겁하고 소리를 지르시더라. 그때가 스물다섯이었는데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배우라는 직업을 계속 할 수 있을지 혼자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 엄태화-엄태구 형제는 함께 5편의 단편영화를 찍었고, 곧 개봉할 장편 <가려진 시간>에도 함께 한다. 어느새 서로에게 없어선 안 될 좋은 동료가 됐다. ⓒ 이정민
목줄이 풀리다
강한 트라우마였고, 그래서 엄태구가 <밀정> 배역을 받자마자 가장 신경 쓴 게 일본어 발음이었다. 히가시 역의 배우 츠루미 신고가 흔쾌히 도움을 주었고, 무엇보다도 엄태구는 지금껏 괴로움의 연속이던 연기가 다르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괴롭히며 배역을 준비하던 과거에서 한 발짝 나아간 셈이다.
"처음으로 영화 현장 술자리에 있어봤다. 부담감에 촬영 직전까지 사람을 만나지 않곤 하던 때보다 좋더라. 새벽까지 선배들과 많은 얘기도 하고 촬영장을 가보기도 했다. 이번 현장이 어떤 느낌이었냐면 뭐랄까 (목을 만지며) 감독님께서 내 목에 달려있던 목줄을 끊어주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음껏 했고, 그걸 또 송강호 선배가 다 받아주셨다. 단 한 번도 '아깐 왜 그랬냐?'라고 하신 적이 없다. 다르게 연기하면 다 다르게 받아주시고 또 다르게 던져주신다.
물론 촬영 직전까지 고통스러운 건 변함없다. 근데 참 희한한 게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해가도 현장에서 없어지는 경우도 많더라. 이번에도 그랬지만 스스로는 후회가 남지 않는다. <밀정> 연기의 힘듦은 당연한 거 같고, 그래서 더욱 감독님과 송강호 선배의 은혜…. 죄송하다 이 단어밖에 생각 안 난다. 그 은혜를 더 느낄 수 있었던 거 같다. 제겐 <밀정>은 하기 전과 그 이후로 나뉠 정도로 의미가 크다. 연기가 더 좋아지고 그런 건 모르겠는데 이 직업에 임하는 자세는 크게 바뀔 거 같다. 여러 면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느낌이다.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연기하면서 행복하다는 말을 했다. 진짜 지금까진 부담과 고통의 연속이었는데 즐거움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먹고 살기 위한 발악
교회 친구의 권유로 관심을 갖게 된 연기자의 길을 그는 지금껏 달려오고 있다. 필모그래피 상에는 2007년이 데뷔로 돼 있지만 그전부터 대학로 등을 전전하며 연극 무대에 오르곤 했다. 힘들다 말하면서도 엄태구는 청소년 시절 교회에서 함께 촌극을 올리던 친구와 나누던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연기하게끔 하는 동력 중 하나다. 또한 <잉투기>에서 함께 작업했고, 곧 상업영화 <가려진 시간>을 발표하는 엄태화 감독 역시 주요한 버팀목이다.
"먹고 살려고 발악하는 거다(웃음). 직업이다 보니 그만둘 수 없고, 살아 있으려 처절하게 노력하는 건 사실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매일 아침 다른 직업이 뭐 있을까 찾아보곤 했다. 실제로 몇 개를 해보기도 했다. 근데 결국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어떻게든 버텨왔다. 가장 중요한 힘은 신앙이었던 것 같고, 또 나를 보며 행복해하시는 부모님도 원동력이다.
형은 진짜 큰 버팀목이다. 형제니까 뭘 같이 하자 이런 건 솔직히 없었다. 단편을 찍을 때도 다른 배우가 삭발을 못하겠다고 해서 내가 대신 들어간 거고, <잉투기>도 내가 아닌 다른 내정자가 있다고 들었다. 내가 참여한다고 했을 때 주변 반대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가족 앞에서 연기한다는 게 참 부끄럽더라. <기담> 때도 진짜 숨고 싶었다. 지금은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려 하는 것 같다."
▲ "연기를 사랑하게 됐다"는 말이 쉽게 나온 건 아니다. 엄태구에겐 한 차원 다른 경지로 연기가 다가왔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의 차기작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 중 하나다. ⓒ 이정민
인터뷰 말미 그는 "감히 이 직업을 사랑하게 된 거 같다"고 말했다. 발악에서 즐길 줄 아는 단계에 이른 걸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당장 차기작 <택시운전사> 촬영을 앞두고 있는데 역시 고민 중이란다. 송강호와 또 다시 호흡을 맞추는 셈인데 광주 민주화 항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대해 그 나름의 깊은 분석을 품고 있었다.
차마 입가에서 돌던 이야기를 다 꺼내지 않고 엄태구가 어렵게 뱉은 말은 '진심'이라는 화두였다. "진심 그것 하나만 갖고 가는 게 맞는 거 같다"며 눈빛을 밝혔다. 마냥 낯을 가리는 것 같지만 진심을 잃지 않으려 하는 사람, 이게 바로 엄태구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