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빛내는 또 다른 주역을 찾습니다. 연기하는 배우라는 점에서 '주'와 '조'는 따로 없습니다. 혹시 연기는 잘하는데 그동안 이름을 잘 몰랐다고요? 가만 보니 이 사람 확 뜰 것 같다고요? 자신의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온 이들을 <오마이스타>가 직접 '픽업'합니다. [편집자말] |
▲ 영화 <터널>과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 활약한 배우 남지현을 만났다. ⓒ 이정민
우연히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 이후 연기를 시작한 8살 소녀는 매번 묻기 일쑤였다. "혹시 감독님이 무서운 사람이에요?" 한 퀴즈 프로에 재미삼아 출연한 모습을 본 드라마 PD가 연락한 게 계기였다. "엄마도 저도 연기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이렇게 오게 됐네요"라고 웃으며 어린 시절의 일부를 꺼내보였다.
배우 남지현을 5일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옥에서 만났다. 이제 만 스무 살이 된 그를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가 출연한 작품들 때문이다. 벌써 13년차. 대중들은 이미 드라마 <로비스트>(2007) 속 어린 마리아, <선덕여왕>(2009)의 어린 덕만공주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지 않나. 최근엔 드라마 <쇼핑왕 루이>의 주연을 맡아 출격 대기 중이다. 픽업(Pick Ip)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다소 늦었는지도.
뛰어난 작품 해석력
대중에게 공개된 남지현의 가장 최근 모습은 단연 영화 <터널>과 <고산자, 대동여지도>다. 전자에선 영문도 모른 채 터널 붕괴 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어간 청년 미나였고, 후자에선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원망한 딸 순실이었다. 장르는 다르지만 모두 슬픈 운명을 맞이하는 캐릭터다. 극적 전개를 위해 스러져간 이 캐릭터들을 남지현은 어떻게 이해했고, 해냈을까. 어찌 보면 소모적으로 쓰일 법한 두 캐릭터는 남지현의 연기로 그 생동감이 잘 살아난 경우다.
"<터널>에선 아픈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고민이 많았어요. 미나가 부상 당한 채로 등장하잖아요. 감독님과 얘길 많이 했죠. 관통상을 당한 건 아니고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고 내부 출혈이 있는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럼 폐에 상처가 있을 거고 숨을 못 쉬겠구나 생각했죠. 촬영할 때도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 가슴 쪽을 압박한 상태로 해놓고 연기했어요.
굉장히 무섭고 심각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영화 속 유머가 빛난다고 생각했어요. 어찌 보면 미나는 민폐를 끼치는 인물일 수 있잖아요. 정수(하정우 분)에게 위기만 안겨주고 떠나는데 사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관객들이 미나를 미워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감독님 역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미나가 정우에게 많이 주고 떠난다 하셨죠. 일단 탱이(영화 속 미나가 데리고 있던 개) 사료도 있고(웃음), 미나 차의 경음기를 빵빵거리며 정우가 살아있음을 알리기도 하고. 정수의 인간성을 잘 드러내 주는 설정이 있기에 저도 잘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 순실(왼쪽)은 아버지 김정호에게 틱틱 쏘아대면서도 누구보다 그를 지지하고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 CJ엔터테인먼트
관계당국의 구조시스템이 잘만 작동했다면 정수나 미나 모두 금방 구조됐을 터, 영화 속에서 신입사원 연수에 못갈 수도 있다며 엄마에게 회사에 말해달라고 하는 그의 모습이 더욱 짠하게 다가온다. 이 모습이 <고산자, 대동여지도>에도 이어진다. 보통 사람들을 위한 지도 제작에 미쳐있는 김정호(차승원 분)의 가족애를 받아내고 지지하는 축이 바로 순실이다. "순실 역시 백성 중 하나이기에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너무 집을 멀리하는 건 아닌지 그 사이에서 갈등한 인물"이라고 남지현이 설명했다. 대의를 위해 동분서주 하는 아비를 둔 가족의 심정을 대변하는 셈이다. 관객 입장에서 충분히 몰입할만한 캐릭터다.
고민의 나날들
영화에 표현되진 않지만 수 년 간 집을 비우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순실은 내면 갈등을 겪었을 거다. 그리고 고맙게도 아버지를 이해하는 딸로 자라났다. "가족이 걱정할까봐 고민이 생기면 혼자 생각하면서 해결하는 편"이라고 본인의 성향을 털어놓는 남지현의 모습에서 언뜻 순실의 모습이 보였다. 애초에 우연히 시작한 배우 일을 그것도 어린 나이부터 해오며 남지현이 품었을 고민들이 궁금했다.
"2004년, 아마 여덟 살이었을 거예요. 처음 연기를 한 이후 한동안은 작품을 들어가기 전에 제가 꼭 묻는 게 '감독님이 무서우세요?'였어요. 현장에서 엄하게 혼내셨거든요. 드라마 뒤풀이 때 물론 감독님이 네가 미워서가 아니라 현장 분위기가 중요해서 그랬다고 말씀했지만 그때 기억이 무섭게 남아있었어요(웃음).
사실 중학생 때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내가 왜 연기를 하지?' 고등학교 초반까지 고민했는데 항상 일은 일대로 하면서 이런 고민을 갖고 있었죠. 난 학생인데 이 일을 하는 게 맞는지, 잠깐 쉬어야 하는 건 아닌지, 난 지금 행복한 건지, 내 의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의지가 아닌지 등등. 그때 연기를 그만두지 않아서 지금까지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느 날 문득 차 안에서 '내가 연기를 평생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근데 하긴 할 것 같은데 즐겁게 할 수 있을까? 이건 잘 모르겠더라고요.
연기할 때 왜 힘들고 부담이 큰지 그 원인은 찾았어요. 그동안 작품 할 때 나 자신을 괴롭혀야 잘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거든요. <가족끼리 왜 이래>를 하면서 좀 바뀌었어요. 선생님들이 많이 나오시잖아요. 오히려 힘을 빼고 즐겁게 해야 더 잘할 수 있고, 시청자 분들 반응도 좋다는 걸 알았죠. 다음 고민은 어떻게 하면 현장에서 더 에너지 넘치게 할 수 있을지, 어떤 마음으로 임해야할지인데 연기가 쉬워지는 날은 절대 오진 않을 거 같고(웃음), 연기를 대하는 태도가 변할 거 같아요."
▲ 13년 차 연기 경력의 남지현. 밖에서 보기엔 마냥 뜨거운 청춘이라지만 누구보다 연기에 대해 고민한 시간이 깊었다. ⓒ 이정민
자신을 탐구하는 눈
이런 고민들과 함께 그의 롱런 비결은 따로 있다. 아역 출신 배우들이 대부분 화려했던 과거 이후 주춤하곤 하는 게 우리 연예계다. 급변하는 주변 환경과 상황에 어릴수록 적응이 힘든 법. 그만큼 자신의 내면을 지키기 어렵기에 무엇보다 연기와 일상생활을 잘 구분하는 게 우선이다. 캐스팅 담당자들이 먼저 방학이 언제인지 물었을 정도로 남지현은 아역 때부터 학교생활과 연기 구분이 철저한 편이었다.
대학교 진학 때 연극영화과가 아닌 심리학과를 택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할리우드엔 나탈리 포트만, 한국엔 고아성, 박은빈 등이 연기관련 학과가 아닌 심리학과에 진학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주변에선 연기에 도움이 될까봐 그 과에 갔는지 묻는데 내게 연기와 학문은 별개"라고 확고하게 남지현이 답했다.
"중‧고등학교 때 진로 고민을 많이 하잖아요. 적성검사에서 제게 맞는 직업 후보 중 하나였어요. 제 경우엔 일자리는 이미 있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공부하고 싶은 걸 하자는 생각이 있었어요. 일단 인문계열이었죠. 국문과, 사회학과 등도 살펴봤는데 가장 흥미로운 게 심리학이었어요. 재밌게 할 수 있을 거 같았죠. 나름 일찍 찾은 셈인데 고1때부터 여러 활동을 했어요. 도서부 안에서 토론도 하고 독후감도 매주 하나씩 쓰고요. 세미나 이런 곳도 다니고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죠. 노력도 잘 먹혔고요. 아, 박은빈 언니가 직속 선배예요. 수업이 겹치는 건 없어서 매번 스치면서 인사해요(웃음). 많은 분들이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하는 걸 심리학이라 생각하시는데 그것도 있지만 뇌구조도 배우고, 이론을 뒷받침 하기 위한 여러 실험들도 해요. 의도치 않게 생물이나 자연과학이 끼어들죠(웃음).
언젠가 가만히 생각해봤어요. 작품을 끝내고 다시 충전할 수 있는 게 전 일상생활인 거 같아요. 학교생활 하는 게 좋아요. 어렸을 땐 방학 때만 일했고, 이젠 대학생이니 휴학은 좀 했네요. 작품과 완전 겹치지 않는 이상 휴학은 잘 안하려 하는데 이미 두 학기를 했네요!"
▲ 일상의 소중함을 잘 알고, 연기와 분리하는 능력 역시 탁월하다.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인거 같다"며 남지현은 진지하게 답했다. ⓒ 이정민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동하면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게 자연인 남지현의 일부였다. "글을 쓸 때도 그렇고 이성적으로 표현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익숙하다"고 말하며 그는 "다만 감성 표현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게 고민"이라 고백하기도 했다. 나름 진지한 고민이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신을 거스르지 않으려 한다"며 "무엇을 하든 후회는 남기지 말자 주의"라고 다짐하듯 말하는 남지현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이같이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자신을 탐구하는 20대 배우가 어디 있을까. 쉽게 찾을 수 없는 보석 같은 배우임은 분명하다.
▲ 곧 방영할 드라마 <쇼핑왕 루이>를 비롯해 그의 행보가 사뭇 더 궁금해진다. ⓒ 이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