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워즈의 아버지' 조지 루카스 감독은 1971년에 데뷔해 올해로 감독 생활 54년째를 맞지만 실제로 그가 직접 연출한 영화는 단 6편에 불과하다. 게다가 데뷔작 <THX 1138>과 두 번째 영화 <청춘낙서>를 제외한 나머지 네 작품은 모두 <스타워즈> 시리즈였다. 그렇게 자신의 평생을 <스타워즈>에게 바친 루카스 감독은 지금도 많은 관객들로부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못지 않은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루카스 감독처럼 한 가지 전문장르만 집중적으로 파는 감독이 있는 반면에, 선보이는 영화마다 전혀 다른 색깔로 관객들에게 새로운 매력을 선사하는 감독도 있다. 개성 있는 연출과 특유의 미장센으로 많은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김지운 감독이 대표적이다. 김지운 감독은 최근작 <인랑>과 <거미집>이 연속으로 흥행에 실패했음에도 여전히 한국영화계에서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을 가진 감독으로 꼽힌다.

코믹 잔혹극(<조용한 가족>)이라는 독특한 장르로 데뷔한 김지운 감독은 생활밀착형 코미디(<반칙왕>), 액션 누아르(<달콤한 인생>), 만주 웨스턴(<놈놈놈>), 복수스릴러(<악마를 보았다>)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지난 2003년에는 여성배우 3명을 전면에 내세운 정통 호러(공포)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개봉 2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나홍진 감독의 <곡성>에 이어 한국 호러영화 흥행순위 2위에 올라있는 <장화, 홍련>이다.
 
 <장화, 홍련>은 2009년 할리우드에서 <안나와 알렉스:두 자매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됐다.

<장화, 홍련>은 2009년 할리우드에서 <안나와 알렉스:두 자매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됐다. ⓒ 영화사청아람(주)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공포영화 전성기

최근엔 스타배우가 출연하는 호러영화도 드물고 충분한 제작비가 투입되는 호러영화도 거의 없을 정도로 한국영화에서 호러장르는 깊은 침체에 빠져 있다. 신인급 배우가 출연하는 저예산 호러영화들이 꾸준히 개봉하지만 2018년에 개봉했던 <곤지암> 정도를 제외하면 흥행작이 거의 없었다. 매년 여름 시즌만 되면 기다렸다는 듯 호러영화들이 앞다퉈 개봉되던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하면 부진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 호러영화 전성기의 시작을 알렸던 영화는 역시 1998년 여름을 강타했던 박기형 감독의 <여고괴담>이었다. 학교에서 죽은 학생이 귀신이 돼 학교를 계속 다닌다는 설정의 <여고괴담>은 공포영화의 레전드 장면이 된 최강희의 '점프컷'을 비롯해 많은 명장면을 남기며 서울에서만 62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여고괴담>은 지난 2021년까지 23년 동안 총 6편의 시리즈가 제작됐다.

북미에서 1996년에 개봉한 호러영화 <스크림>이 국내에서 1999년에 개봉해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국내에서도 2000년대 초반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 사이의 젊은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호러영화들이 많이 제작됐다. 그 중에서도 김기훈 감독의 <찍히면 죽는다>와 김인수 감독의 <해변으로 가다>는 2000년 8월 나란히 개봉했는데, 두 영화 모두 '한국형 슬래셔 무비(연쇄살인을 소재로 다룬 공포영화)'를 표방했지만 워낙 졸속으로 만들어지면서 흥행에 실패했다.

2002년 7월 개봉한 안병기 감독의 <폰>은 <동감>, <가위> 등을 통해 잠재력을 보였던 신인배우 하지원의 첫 단독주연 영화였다. 청소년 성매매 폭로기사를 쓴 기자가 전화로 인해 무서운 이야기들을 겪게 된다는 영화 <폰>은 서울에서만 75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안병기 감독의 <가위>와 <폰>을 연속으로 흥행시키며 '호러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 공수창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었던 2004년작 <알포인트>는 베트남전에 파병된 군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독특한 내용의 호러영화다. 강한 무기를 가진 군인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한 명씩 사라지는 이 영화는 여성들의 비명으로 채워진 일반 호러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공포를 선사했다. 공수창 감독은 2007년에도 군대를 배경으로 한 밀리터리 공포영화 <GP506>을 차기작으로 선보였다.

314만 관객 공포에 떨게 한 호러 명작
     
김지운 감독은 1998년 배우 최민식과 송강호가 함께 출연하는 흔치 않은 영화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했다. 2년 뒤엔 평범한 회사원이 프로레슬링에 도전하는 <반칙왕>을 통해 흥행감독으로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김지운 감독은 소시민의 이야기를 통해 재미를 극대화하는 재치 있는 신예 코미디 감독으로 많이 알려졌다. 그런 김지운 감독이 3번째 장편영화로 정통호러 <장화, 홍련>을 선보였으니 관객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장화, 홍련>은 개봉 당시 많은 관객들로부터 캐스팅이 다소 약한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수미 역의 임수정은 데뷔 후 단 두 작품에만 출연한 신인이었고 수연 역의 문근영도 아역배우의 티를 벗지 못한 상태였다. 새 엄마 은주를 연기한 염정아 역시 아직 영화에서는 확실한 대표작이 없었다. 

그러나 불안해 보였던 세 배우는 영화 속에서 완벽한 연기호흡을 선보이며 314만 명 관객동원을 견인했다.
 
 임수정(왼쪽)과 염정아의 연기대결은 <장화, 홍련>의 가장 큰 볼거리다.

임수정(왼쪽)과 염정아의 연기대결은 <장화, 홍련>의 가장 큰 볼거리다. ⓒ 영화사청아람(주)

 
<장화, 홍련>은 '임수정의 발견'이라고 요약해도 큰 과장이 아닐 정도로 임수정이 영화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디션 당시 '아이라 하기엔크고 어른이라 하기엔 어린' 배우를 찾으려 했다는 김지운 감독은 그를 보고 곧바로 수미 역에 낙점했다. 영화 속에서 수미의 복잡한 심리를 완벽하게 묘사한 임수정은 <장화, 홍련>을 통해 청룡영화상을 비롯해 5개 영화제의 신인상을 휩쓸었다.

<장화, 홍련>이 아주 무서운 호 영화임에도 3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2세 관람가라는 너그러운(?) 등급 덕분인 점도 있다. 노골적으로 잔인한 묘사가 없다는 이유로 낮은 등급을 받아 여름방학을 맞은 학생 관객들을 대거 극장으로 끌어 들인 것. 1991년생 배우 박소담은 <삼시세끼-산촌편>에서 만 12세 때 <장화, 홍련>을 극장에서 관람했다가 '심장마비 걸릴 뻔 했다'는 생생한 후기를 전하기도 했다.

다양한 캐릭터 가능한 배우로 도약한 염정아
     
염정아가 연기한 은주는 남편 무현(김갑수 분)을 두고 수미와 은근히 기 싸움을 하면서 겁 많고 얌전한 수연을 학대한다. 하지만 이는 수미의 망상에 의한 것으로 이 같은 사실이 영화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다. 사악한 은주의 존재가 수미의 망상이라는 사실이 영화 속 반전이었지만 <장화, 홍련>은 관객들에게 반전의 충격을 주는 게 목적인 영화가 아니었다. 실제로 김지운 감독은 영화 속에서 틈틈이 관객들에게 반전에 대한 힌트를 줬다.

염정아는 <장화, 홍련>에서 수미의 망상 속 은주와 실제 은주를 모두 연기하며 사실상 '1인 2역'을 소화했다. 배우로서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염정아는 기괴한 젊은 계모를 잘 표현하며 연기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문근영은 <장화, 홍련>이 개봉한 2003년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지만 영화를 촬영한 2002년에는 중학생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중학생의 어린 나이에 귀신 역할을 소화했다는 뜻이다(하지만 수연은 영화 내내 관객들을 한 번도 놀라게 하지 않는 착한 귀신이었다). 

'사망연기 전문배우', '프로사망러'로 불리는 배우 김갑수는 40대 시절이던 2003년 <장화, 홍련>에서 아픈 아내를 두고 아내를 간병하던 간호사와 불륜을 저지르는 아버지를 연기했다. 
 
 염정아는 <장화, 홍련>에서의 열연을 통해 배우로서 한 단계 위로 도약했다.

염정아는 <장화, 홍련>에서의 열연을 통해 배우로서 한 단계 위로 도약했다. ⓒ 영화사청어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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