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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모티브, 그때처럼 뜨거울 수 있을까

[안지훈의 무대 안팎 이야기] 올림픽과 함께 정치인이 된 인권 변호사, 연극 <초선의원>

24.03.28 14:20최종업데이트24.03.2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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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어떤 일이 있었나'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었다고 답한다. 전후 약 30년만에 올림픽을 개최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열광이 전국을 물들였지만,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단면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모두가 사회의 어두운 면을 감추고자 할 때, 어두운 면을 들춰내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해엔 5공화국 정부의 비리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국회 청문회도 있었다.

연극 <초선의원>은 그 뜨거웠던 시기를 조명한다. 민주화운동을 하는 학생을 위해 무료 변론을 펼치고, 부당한 처우를 받는 노동자를 돕던 인권 변호사 '최수호'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며 제도권 정치에 발을 내딛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렇게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최수호는 의정활동 내내 가장 약한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또 청문회에서는 가장 강한 사람들을 상대로 호통을 친다. 이쯤에서 눈치챘겠지만, <초선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선 의원 시기를 모티브로 삼고, 각색을 거쳐 탄생했다.

2022년 초연 당시 호평 덕분에 <초선의원>이 2년 만에 재연으로 돌아왔다. 송용진, 김준원, 김대곤이 초선 의원 '최수호'를 연기하며, 최수호의 보좌관 '이명제' 역에 한서원, 윤지현, 김건호가 분한다. 외에 이성희, 김려은, 강신철, 김천, 도예준, 유일한 등이 작품에 참여한다. 3월 22일 개막한 <초선의원>은 5월 12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공연된다.
 

연극 <초선의원> 공연사진 ⓒ 극단 웃는고양이

 
선진국이라는 환상의 명과 암

서울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발표되는 것으로 연극은 시작한다. 사람들은 서울 올림픽 개최에 환호하고, 기자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었다며 '선진국 시민'을 찾아 인터뷰를 요청한다. 기자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은 한 학생은 권위주의 정치를 비판하고, 이에 기자는 "선진국 학생이 아니라 운동권 학생"이었다고 비난하며 마이크를 빼앗는다. 이어 누군가 또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바로 인권 변호사 최수호다. 최수호는 열악한 노동 현실과 팍팍한 서민의 삶을 이야기하며 '선진국 대한민국'에 의문을 던진다. 기자는 다급하게 마이크를 뺏으려 하지만, 최수호는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말을 이어간다.

선진국 시민의 인터뷰, 예컨대 급속한 경제 성장이라든가 올림픽 개최에 대한 자부심 따위의 답변을 바라는 기자의 모습은 상징적으로 보인다. 선진국이라는 아름다운 프레임을 정해놓고, 이에 걸맞은 사례들만을 취사선택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권력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드러낸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이뤘지만, 군부에 협력한 세력이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았고, 여전히 보통 사람들의 열악한 삶은 크게 개선되지 않은 시기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1988년이 뜨겁고 아름다운 시간으로 기억되는 이유일 테다.

연극 <초선의원>, 그리고 최수호는 '선진국 대한민국'이 애써 감추고자 했던 사회의 어두운 면을 파헤쳐 드러낸다. 거제 조선소에서 부당한 노동 현실에 맞서 싸우다 세상을 떠난 노동자 '이석규'의 곁을 인권 변호사 최수호가 지킨다. 최수호가 이석규를 비롯한 노동자들에게 노동법을 알려주던 때를 회상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훗날 최수호는 이들을 대변하겠다며 국회의원이 되고, 수은 중독으로 죽음을 목전에 둔 노동자 '문송면'을 찾아간다. 올림픽을 위한 성화가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판자촌이 철거되는 장면이 TV를 통해 중계되고, 최수호의 보좌관이자 운동가였던 청년 '이명제'를 정보기관이 가혹하게 고문하기도 한다.

이런 시대의 대한민국을 누가 당당히 선진국이라 할 수 있을까?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뤘고, 올림픽을 개최했다면 선진국인 걸까? 최수호는 이미 극 초반에 선진국의 조건을 이야기했다. 여러 종목을 두고 정정당당하게 겨루는 올림픽처럼, 선진국이라면 다양한 시민의 요구가 표출될 수 있어야 하고, 요구가 정당하게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럼 이쯤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과연 선진국인가? 이미 UN은 2022년 대한민국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했는데,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라 불릴 만한 나라인가? 최수호의 말대로 다양한 시민의 온전한 삶이 지킬 수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라면, 필자에겐 대한민국을 당당하게 선진국이라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아직 없다.
 

연극 <초선의원> 공연사진 ⓒ 극단 웃는고양이

 
우리는 정치에 뜨거움을 기대할 수 있을까

실화나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삼은 창작물에서는 선택과 집중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창작진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맞춰 이야기를 선별하고, 적절한 기법을 활용해 강조하는 식이다. 연극 <초선의원>에서는 올림픽의 열기에 맞춰 최수호라는 정치인의 뜨거움이 드러난다. 특히 최수호가 누군가와 대립하는 상황을 탁구와 같은 올림픽 종목으로 표현한 연출이 돋보인다.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풀리지 않은 의혹이 남아 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등 초선 의원 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극중 최수호를 통해 전달된다. 무대 위 배우의 목이 멜 정도로 대사는 강렬하고, 최수호와 이명제가 객석까지 내려와 땀 흘리며 대중연설을 하는 장면도 있다. 최수호는 노동법 개정이라는 목표를 위해 상대당 초선 의원 '민현수'와 의기투합하며, 자신이 뜻한 바가 이루어지지 않자 목 놓아 좌절하기도 한다. 이 모든 장면에서 필자는 '뜨거움'을 느꼈다.

동시에 작금의 우리 정치에도 이 뜨거움을 기대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직업 정치인이라면 다음의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를 대표하여 무엇과 싸울 것인가?' 누군가는 노동자를 대표하여 부당한 노동 현실과 억압적 사회 풍조에 맞설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장애인을 대표하여 사회의 편견과 맞설 수도 있으며, 또 누군가는 기업을 대표하여 각종 규제와 싸울 수도 있다. 21대 국회가 막을 내리는 지금, 이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 있는 직업 정치인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실제 행동으로까지 옮긴 정치인은 훨씬 적을 테고, 자신이 뜻한 바를 관철하지 못했을 때 최수호처럼 좌절한 정치인은 더 적을 터이다.

<초선의원>의 최수호처럼 정치를 하는 이유의 가운데에 대의를 둔 정치인은 또 얼마나 되며, 그런 정치인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쯤에서 직업 정치인의 소명 의식을 다룬 고전인 막스 베버(Max Weber)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다시 펴본다. 베버는 정치인이 지녀야 할 덕목 중 하나로 '대의에 헌신하는 열정'을 제시한 바 있다. 과연 우리 정치에 '대의'란 게 남아 있는지, 서로를 향한 적대와 증오 속에 대의가 설 자리를 잃은 건 아닌지, 무엇보다 <초선의원>이 보여준 '헌신'과 '열정'은 남아 있는지 고민해보게 된다.
 

연극 <초선의원> 공연사진 ⓒ 극단 웃는고양이

 
 
덧붙이는 글 연극 <초선의원>을 제작한 극단 '웃는고양이'는 정치적 의도나 성향을 담지 않는 예술적 활동을 지향한다고 밝혔습니다.
공연 연극 초선의원 극단웃는고양이 대학로자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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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행정학과 정치외교학, 사회학을 수학했다. 현재까지 뮤지컬, 야구, 농구, 그리고 여행을 취미로 삼는 데 성공했다. 에세이 『여행자로 살고 싶습니다』를 썼다. │ anjihoon_51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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