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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생각할수록 울분... 그래서 이 장면 넣었다"

[inter:view] 김지운 감독이 <밀정>에 녹여낸 '가느다란 희망'의 정체

16.09.17 10:20최종업데이트16.09.1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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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은 특유의 공간활용과 장르변주로 '스타일리시하다'는 평을 듣는 인물. <밀정>은 그의 장르적 해석과 동시에 인물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 이정민


<밀정>을 두고 김지운 감독은 "차갑다"는 형용사를 많이 사용했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라는 우리의 비극을 극화시킬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일까. 공식 석상에서 그는 여러 번 '국뽕', 그러니까 무조건적인 자국 찬양 내지는 자국 중심의 시각을 피하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마치 멀고도 중요한 여정을 떠나기 전 내뱉는 선언처럼.

선언의 반복은 반대로 말하면 그 자체가 강력한 강박으로 작용했다는 뜻이다. 사실 김지운 감독 스스로 차가움을 외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의 영화 대부분은 정제된 감정 안에서 예상치 못한 변주를 하곤 했다. 데뷔작 <조용한 가족>부터 <장화, 홍련>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등을 보자. 영화 캐릭터들은 격정적인 감정을 토하지만 결코 김지운 감독은 그 세계 안에서 함께 울고 웃는 법이 없었다. 음악가에 비유하면 김지운 감독은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현란한 솔로 연주를 보이는 기타리스트 같았다.

<밀정>은 넓게 보면 김지운 감독의 변화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영화 속 세상에 일정 거리를 두며 현실을 관조하던 그가 표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의열단원분들 이야기에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 것처럼 김지운 감독은 시대적 비극과 개인 사이에서 고뇌하던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 분)과 목숨을 걸기에 망설임 없었던 김우진(공유), 정채산(이병헌) 등에 밀접하게 동기화 된 것처럼 보였다. 그가 '희망'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심증을 품고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직접 만났다.

<밀정>의 시작

<밀정>은 스파이물이다. 이견의 여지가 없다. 김지운 감독이 레퍼런스로 삼은 작품인 캐럴 리드 감독의 <제3의 사나이>(1949),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 등을 굳이 꼽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철저히 외부인 시선을 견지할 수 있는 앞선 작품과 <밀정>이 다르다는 점이다. 역사와 영화적 재료 사이에서서 감독은 고뇌해야 했다. 이중 스파이인지 일제의 밀정인지 그 역사적 평가가 유보된 황옥(이정출의 모델), 청춘의 시기에 기꺼이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무장 투쟁을 하던 의열단원은 훌륭한 이야기 재료임과 동시에 김지운 감독에겐 조각하기 까다로운 원석과도 같았을 것이다.

"애초에 스파이물을 만들고 싶었고, 어떤 분위기를 가져갈까 고민하다 콜드 누아르를 생각한 거다. 물론 이런 장르가 있는 건 아니고 내가 그냥 명명한 거지만 어쨌든 스파이의 냉혹한 세계를 말하고 싶었다. 겨울을 배경으로 한 것도 그 계절의 묵직함 때문이다. 연기와 김이 자주 나오는데 연기 이미지는 등장인물의 모호한 정체성을 무드화 시키는데 일조한다.

다만 <밀정>이 서부 냉전시대 스파이물과 다른 성격과 온도가 있음을 느꼈다. 실패의 역사를 기록하는 지점에서 의열단원 하나하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니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 영화를 만들 때 경계한 게 바로 신파와 국뽕의 요소였고, 그렇게 갈 여지가 많았는데 그걸 통제하고 누르기 위해 감각적인 스타일을 넣은 거지. 그 경계를 지키는 틀을 만들려고 했다. 결국 차갑게 시작해서 뜨겁게 끝난 영화가 된 거다(웃음)."

영화 <밀정> 현장에서 지휘 중인 김지운 감독.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일각에서 이정출이 투사로 변하는 지점의 설명이 약하다는 등 서사를 지적하지만 인물과 그들의 감성에 방점을 두고 따라가다 보면 큰 흠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송강호와 이병헌이 각각 안내하는 영화 속 인물이 전형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다. 김지운 감독은 "역사적으로 황옥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김원봉 선생이 확신에 차서 옹호하는 기록이 있고, 나 역시 잃었던 걸 회복하는 사람이라는 시점에 가깝게 봤다"고 설명했다.

"황옥이 정말 투사였는지 여부보다 내게 중요했던 건 세상이 사람을 이렇게 분열시키고 변질시킨다는 사실이다. 시대 모순을 품은 게 바로 황옥이었고, 이정출이란 캐릭터로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라 봤다. 악질 일본 경찰도 아니고 의열단도 아닌 그를 통해 시대의 균열을 잘 설명할 거 같았다. 송강호의 깊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그 시대 그 인물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고 싶게 만들려고 한 거다."

울분과 통한의 감정

곧 <밀정>은 올라오는 뜨거움을 누르고 누르며 압축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김지운 감독의 이런 내면 갈등이 훌륭하게 드러난 지점이 폭탄을 싣고 가는 경성행 기차 안에서의 격투신과 상해 은신처에서 정채산과 이정출, 김우진이 함께 만나는 장면이다. 전자는 그간 쌓아왔던 서로에 대한 의심이 폭발하는 대목, 후자는 그 의심과 긴장이 차곡차곡 쌓이는 지점이다.

"가장 어려웠던 게 바로 일상 대화에서 긴장감을 표현하는 거였다. 상해로 간 이정출이 누군가에게 쫓기는 느낌을 주려 했고, 이른 새벽 깨게 만든 것도 그런 이유다. 아무도 없는 아침에 바스락 거리는 소리들로 이상한 긴장감을 조성하는데 김우진이 느닷없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나. 그리고 이상한 제의를 한다. 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빛으로 나올 때 정채산이 등장한다. 그때 관객은 순간 이정출이 된다. 이 연기를 송강호, 이병헌이 했을 때 오는 쾌감이 있다. 마치 용쟁호투를 보는 느낌이랄까. 대사, 호흡, 표정까지 연기 장인의 솜씨로 보이니 나도 전율이 올라왔다.

우리 현장이 참 재밌는 게 배우들이 집에를 그렇게 안 간다. 집에 갔던 배우들도 다시 오곤 했다. 이상한 애정과 끈끈함이 있었다. 그 날도 이병헌, 송강호, 공유를 쓰리샷으로 잡는다니까 배우들이 꾸역꾸역 모였다. 심지어 새벽 기차를 타고 내려온 친구도 있었다. 이들의 연기를 한 카메라에 담는다는 게 흔치 않은 기회지.

가장 공을 들인 건 아무래도 기차신이다.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게 집약돼있다. 시대의 역풍과 순풍을 맞으며 거기에 역류하고 관통하던 인물을 동선으로 얘기하려 한 거지. 그 신을 만들 때 참 재밌었다. 내가 미술 감독에겐 최고의 감독이라더라. 준비된 공간 구석구석을 다 사용한다고(웃음). 아마 미술 감독 입장에선 보답 받는 느낌일 수도 있겠다. 필요 없어 보일 것 같은 공간을 쓰는 거니까. 가만히 보면 내가 공간에 대한 강박증 내지는 신경증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웃음)."

영화 <밀정>에서 의열단 김우진(공유)과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 그리고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이 만나는 장면. 세 캐릭터의 일상 대화만으로 강력한 긴장감이 표현되어야 했다. 김지운 감독이 가장 어려웠다고 고백한 지점이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청산되지 않은 역사

김지운 감독의 뜨거움에 대해 말할 차례다. <밀정>을 찍으며 분명 현재까지도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잔재에 대한 생각을 했을 터. 조용히 그가 끄덕였다. "당시 그들이 의로운 투쟁을 벌이면서 기꺼이 본능의 반대 지점인 죽음에 다가가는데 거리낌이 없는데 분명 지금 덜 청산된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했다"고 운을 뗐다. 

"아관파천, 경술국치 이게 다 외세에 의해 우리가 겪은 일이다. 그러다 강제합병을 겪는다. 지금 우리 국력과 경제력, 삶의 질이 비약적으로 발전된 게 있지만 아직도 딜레마에 빠져있다. 국제정세에서 주도적이지 못한 딜레마가 있잖나. 그때도 그런 딜레마를 겪은 거고, 현대적 의미에서 환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뜨거움을 사실 김지운 감독은 음악에 담아냈다. 1920년대 서구에서 유행하던 'When you're smiling' 같은 스윙재즈나 1928년에 발표된 라벨의 '볼레로', 또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등이 격정적인 거사 장면에 깔린다. 언뜻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낭만적 노래지만 김지운 감독은 "만약 우리가 주권을 뺏기지 않았다면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기며 향유했을 노래"라고 설명했다.

"물론 당시 친일파 등은 그 음악을 편하게 들었을 거다. 가장 비극적 풍경엔 의로운 사람들이 항상 담겨 있었고. 그게 너무 원통한 거다. 갖고 있는 걸 뺏겨서 그걸 달라고 하는데 (일제가) 짓누르잖나. 생각할수록 울분이 치밀어 오르지. 그리고 내가 과연 고문을 견뎌냈을까 하는 생각, 결국 나도 회색인처럼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런 사람들에겐 그 음악이 마치 장송곡처럼 들렸을 것이다."

변주의 정체

영화에 흐르는 격정적인 장면과 마치 상반되듯 흐르는 낭만적인 노래들은 김지운 감독의 복안이었다. ⓒ 이정민


음악의 사용 역시 넓게 보면 김지운식 장르 변주에 포함된다. 어쩌면 이러한 변주를 통해 김지운 감독은 스스로 영화적 생명력을 담보해 온 게 아닐까. 그게 가장 궁금했다. <악마를 보았다>(2010)에서 마치 차가운 세상의 끝에서 곧게 서 있는 것 같았던 그가 <밀정>에서 돌연 미래와 희망을 얘기하지 않나. <밀정>에 담긴 변주의 본질과 그가 겪었을 변화에 대해 물었다.

"(웃음) <악마를 보았다> 때 절대악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 정말 사이코패스라는 게 있다면 자신이 벌인 일에 전혀 후회하지 않을까. 그가 한 짓이 얼마나 끔찍한지 스스로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서 시작한 거다. 그때까지 내 영화는 사실 허무주의였다. <조용한 가족> 때부터 장르를 변주하면서 그 허무주의가 쭉 작품을 관통해 왔다. <놈놈놈>에서 장르에 대한 로망이 해소된 이후 심적 허탈감, <악마를 보았다>를 만들며 느낀 심한 우울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영화를 만들고픈 의욕이 없어지던 때였다. 그러다 뭔가 환기해야 겠다는 아주 가벼운 생각으로 만든 게 <라스트 스탠드>(2013)다. 할리우드 진출이라는 야심을 갖고 한 건 아니다. 물론 그쪽 시스템에 대한 궁금증은 있었지만.

허무의 세계관은 물론 내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전망이 없는 거잖나. 내 허무주의엔 일종의 도피 성격도 있었다. 기대를 갖게 됨으로써 받는 상처를 피하고 싶었던 거지. 어떠한 전망도 주지 않으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게 바로 장르의 변주 덕이었다. 또 젊음의 기운으로도 그런 허무를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시도가 더이상 내게 에너지를 주지 않는다는 걸 느끼고 깜짝 놀랐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 생각했을 때 <밀정>을 통해 어떤 가느다란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거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절망의 끝에서 파멸할 게 아니라 생명력을 추동시키는 일말의 무언가가 필요한 건 아닌가. 헛헛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허무 세계의 끝에서 내가 이 세상에 무엇을 얹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차가운 스타일리스트'의 대명사 김지운은 그렇게 자신의 뜨거운 심장에 대해 말했다. 그렇다고 그의 삶의 기조가 모두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섣부르다. 적어도 이 변화에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있다. 공고하게 지켜왔던 자신의 세계에 스스로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 그의 차기작 중 가장 강력한 후보는 일본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한 <인랑>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기다릴 이유가 분명히 생겼다.

ⓒ 이정민



김지운 밀정 송강호 공유 이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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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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