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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나가지 못한 총알 한 방의 위력

[공모] 내 인생을 바꾼, 내가 사랑한 영화 <택시 드라이버>

16.08.09 11:21최종업데이트16.08.0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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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뚫는 총성이 도달하는 곳은 독자의 심장이다. 전형적인 예로 짝사랑에 실패한 가여운 베르테르와 햇살이 눈부셔 아랍인을 죽인 뫼르소가 있다. 베르테르의 탄알은 짝사랑과 분노로 애끓던 청년들의 슬픔을 꿰뚫었고 뫼르소의 탄알은 세계 2차 대전이라는 부조리에 신음하던 젊은이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이러한 총성들은 극적인 순간을 완성하며 기계의 신(Deus ex machina)처럼 갈등을 한 번에 소거한다. 그만큼이나 현대 영화가 걸작이냐 아니냐는 이 총성의 기능을 어떻게 소모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영화에선 포스터 말대로 여덟 발의 총성이 만들어낸 미스터리인 <공동경비구역 JSA>가 예시에 적합하다 볼 수 있다.)

<택시 드라이버>로 바뀐 내 인생

음악을 전공하던 필자는 영화가 심장에 박은 총성을 계기로 난데없이 문학도로 들어서버렸다.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1976)는 내게 그만큼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영화였다. ⓒ 콜럼비아 픽처스


모든 사람은 각자 가슴에 총성을 박은 영화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필자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다. 음악을 전공하던 필자는 영화가 심장에 박은 총성을 계기로 난데없이 문학도로 들어서버렸다.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1976)는 내게 그만큼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영화였다. 실제 미국에서도 <택시 드라이버>의 아이리스 역으로 출연한 조디 포스터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로날드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총을 겨눈 모방범죄가 일어났을 정도니.

필자가 이 영화를 걸작이라 확신하는 이유는 마지막 탄알이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총탄은 불발이 아니라 화면 바깥에 있는 감상자의 심장을 겨냥한다. 트래비스(로버트 드니로 분)는 자살하지 못함으로 영웅으로 거듭나지만, 그조차도 신문에서 며칠간 떠벌려대다가 그칠 이슈거리에 불과하다. 스콜세지가 진단한 현대는 모두가 예수는커녕 영웅조차 될 수 없는 비루함의 아수라다. 트래비스 그 자체인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는 이 고독을 선명히 드러낸다.

<택시 드라이버>는 마틴 스콜세지가 재해석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다. 그는 이 영화에서 내면의 디스토피아를 그대로 그려낸다. <1984>라든가 <이퀄리브리엄> 등 디스토피아 문학이 그려낸 디스토피아에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들이 외면으로 드러난다. 빅브라더라든가 독재 체제로 나타나는 거대권력은 우리가 꺼려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그 목표를 지목한다. 그 종착점은 대부분 세계를 뒤흔들던 전체주의다.

다수의 디스토피아 영화는 '하나의 목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묵살하는 체제를 마련해 나치와 파시즘을 은유해왔다. (심지어는 좀비 영화나 재난영화에서도 전체주의는 원형이라 볼 수 있는 모티브로 나타난다.) 내면의 디스토피아는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이성복)'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낸다. 이는 우리를 바깥에서 억누르던 폭력들은 더는 외부에서 작용하지 않으며, 우리 내면에 작용한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섬뜩한 <택시 드라이버>의 세계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트래비스(로버트 드니로 분)를 '전역자'라는 한 마디로 그가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다는 사실만 암시한 뒤 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 콜럼비아 픽처스


여기서 우리는 푸코가 제시한 파놉티콘 은유를 살펴봐야 한다. 그는 미시-권력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 감시체제를 가져왔다. 쉽게 말하자면 모든 죄수가 정해진 곳에서 일하고 있지만 자신을 감시하는 자들이 누군지 볼 수 없는 감시 체제를 의미한다. 그 감시체제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규율들이다.

<택시 드라이버>의 세계관이 섬뜩한 이유는 트래비스가 감시망의 일부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기 때문이다. 그가 점퍼 하나를 껴입은 남루한 청년으로 등장했을 때 관객들은 그를 얽매던 과거를 궁금해하기 마련. 스콜세지는 '전역자'라는 한 마디로 그가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다는 사실만 암시한 뒤 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무턱대고 야간 택시운전사가 되겠다는 트래비스를 의심하지만 의심할 근거는 없다. 그 시대에 우후죽순 쏟아져 나온 '베트남 전쟁'의 참혹성을 고발하는 영화라 말하기도 조심스러우며, 한 인간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성장담이라 말하기에도 조심스럽다. 이 영화는 철저히 트래비스의 찌질함이 이끌어나가는 심리극이자 '남성성'을 폭로하는 블랙코미디로 보여야 한다.

이 영화가 처음 나를 사로잡았던 이유는 영화를 관통하는 버나드 허먼의 사운드 트랙이다. 불협화음과 블루스로 가득한 OST는 트래비스와 혼연일체하는 느낌이었다. 당시에는 그 우울한 분위기가 좋아 여러 번 영화를 봤다. 트래비스가 벳시(시빌 셰퍼트 분)를 이끌고 포르노 극장을 찾았을 때도, 콜트 권총으로 아내를 죽이는 남자를 본 뒤 총기를 사러 갔을 때에도 나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앞서 말한대로 스콜세지가 트래비스를 고독에 빠지게 만드는 대상을 명확하게 지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면 볼수록 스콜세지는 은유와 환유로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트래비스라는 인물은 나 또한 이런 캐릭터를 창조해내고 싶다는 욕망을 안겨줬다. 가끔은 내 자신이 저 트래비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영화가 디스토피아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우리를 지배해왔던 기성세대이자 '남성'이라는 기호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러한 은유와 환유를 알아차리기 힘들며, 트래비스의 병적 심리에 집착한다. 트래비스라는 캐릭터가 지닌 강박증은 일탈하려는 욕망을 지닌 현대인의 내면에 잠든 일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트래비스는 고군분투 끝에 다시 기성사회의 희생자로 남는다.

세계는 바뀌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 등장한 장면을 따라 로날드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총을 겨눈 모방범죄가 일어나기도 했다. ⓒ 콜럼비아 픽처스


트래비스의 병적 심리는 '구원'을 향한 강박에서 온다. 이는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라는 말에서 시작하여 누군가를 구원함으로 자신을 구원자의 위치로 놓으려는 강박관념에서 온다. 이 배후에 깔린 것은 이유모를 패배감이다. 예시로 그가 벳시에게 처음 데이트를 신청한 날 멀쩡한 여자가 외로워 보인다는 황당한 이유로 그녀의 연인이 되려한다. 이내 그는 대통령 유력 후보를 만나 '냄새나는 하수구 같은 도시를 청소해 달라'는 염원을 투영한다.

그럼에도 그가 보는 세계는 바뀌지 않는다. 미성년자를 매춘부로 내세우는 도시와 바람난 아내의 머리를 44구경으로 날려버리는 남편, 음담패설을 일삼는 택시기사들로 받은 회의는 어린 창녀를 구원해야겠다는 영웅심으로 나타난다. 동시에 그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세상이라면 대통령 후보를 죽여야겠다는 의지로 체력을 훈련한다. 여기서 그는 우리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남성'이 만들어낸 세계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물론 그도 무감각하게 포르노를 소비하는 남성이다.)

트래비스는 벳시와의 첫 데이트에 포르노 극장을 찾고, 이 때문에 구애를 거절당한다. ⓒ 콜럼비아 픽처스


이는 콜트 44구경이라는 남성 성기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대가리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릴 수 있는 물건으로 묘사된다. (이 대사를 할 때 마틴 스콜세지가 직접 카메오로 출연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미성숙한 아이들마저 돈벌이로 사용하지만 누구도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통령 후보자인 팔렌타인(레오나르도 해리스 분)은 '이 세계는 낙관적이고 또 낙관적'이라고 말한다. 트래비스는 사회를 벌하려는 목적으로 사회의 대표자인 팔렌타인을 저격하려한다. 그러나 트래비스는 그를 저격하는데 실패하고 표적을 포주인 매튜에게로 돌린다. 이는 사회를 구원하려는 대의에서 사회에서 희생당하는 개인을 구원하려는 실천으로 변했음을 의미한다.

트래비스는 아이리스에게 화대를 지불하고 그녀를 구원하려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리스가 포주에게서 탈출하기를 권유한다. 아이리스는 그에게 포주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포주는 실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인의 고독이 '사랑'의 결핍에서 나옴을 알 수 있다. 트래비스는 포르노 때문에 벳시에게 구애를 거절당했으며, 아이리스는 부모님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기에 매춘한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에게 기억됨을 의미하며 우리는 무수한 익명의 대중에 속하기에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 트래비스는 이 사회의 상징을 죽임으로 사회가 변할 것이란 집착을 버리고 아이리스를 구원하려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매춘하는 사람들과 포주 일당을 죽이느라 총탄을 쏟아 붓는다. 마침내 아이리스를 구하고 자살하려 했을 때 불발이 나간다.

한 발의 탄알

트래비스는 이 사회의 상징을 죽임으로, 사회가 변할 것이란 집착을 버리고 아이리스를 구원하려 한다. ⓒ 콜럼비아 픽처스


이 탄알은 주인공이 순교자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그의 체념서린 웃음은 지옥이 영원히 반복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며칠 뒤 영웅으로 신문에 실리지만 며칠 동안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다 그칠만한 이슈거리로 전락해버린다. 택시 드라이버로 돌아온 트래비스는 와 재회하지만 결국 사랑에는 실패한다.

영화 오프닝은 앞선 맥락으로 볼 때 의미심장하다. 비가 내리지만, 와이퍼로 아무리 닦아내도 도시의 야경은 그대로다. 오프닝의 불협화음으로 시작해 엔딩 크레딧에서 버나드 허먼의 블루스로 끝나는 이유는 블루스가 '노예'의 설움을 담은 슬픈 음악이기 때문이다. 부조리를 인식하지만 결국 사회에 잔존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초상을 담은 것이다.

모든 현대인은 그런 의미에서 '지하생활자'다. 구원의 욕망을 지니고 있음에도, 사회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음에도 선뜻 반항하지 못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가 타인을 경멸하면서도 친구들과 어울리려한다는 점, 남들이 창녀 관계를 맺을 동안 혼자 창녀를 구원하려 연설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와 달리 트래비스는 구원을 실천했다는 점이 다르지만 둘은 별반 다를 것 없는 결말을 얻는다. 영화 내내 깔린 음울한 비전은 우리에게 절망감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살아가야한다'는 뜨거움으로 변모한다.

그 뜨거움이 내 심장을 꿰뚫는 순간 나는 이 세계가 허무와 부조리로 가득해도 그것을 이겨나가려는 작은 실천이 우리를 구원에 다다르게 할 수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이 시대에 <택시 드라이버>가 사랑받아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구원받음'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스스로 '구원함'을 만들어야한다. 그 시작은 세계를 의심함으로 시작하는 작은 실천이다.

덧붙이는 글 '내가 사랑한 OOO' 공모작입니다.
#택시드라이버 #트래비스 #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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