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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관중' 모은 롯데, 가슴이 뛰었다

<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10> 부산야구의 두번째 봄, 1991년

11.04.15 15:02최종업데이트11.04.15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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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기자주>
1991년 9월 15일, 롯데 자이언츠는 그 해의 마지막 홈경기에 해태 타이거즈를 불러 들여 5대 1로 승리했다. 시즌 내내 시달렸던 난적이었고, 그날의 승리를 합해도 6승 12패의 적자였지만, 어쨌든 깔끔한 마침표였다. 마운드에서는 오랜만에 제구가 잡힌 박동희가 해태 타선을 힘으로 짓눌렀고, 타석에서는 그 전 해 트레이드의 정신적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채 '처음 3할 이하로 떨어져보는' 수모를 당했던 타격의 달인 장효조가 대타로 출장해 홈런을 날리며 승부의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그날, 롯데 자이언츠는 한국 프로야구사에 또 하나의 빛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일요일이었던 그 날 관중석을 가득 채우며 그 해 100만 1920명 홈관중을 기록해 첫 번째 '백만 관중 동원 팀'이 된 것이다.

그 해 롯데가 백만 관중을 야구장으로 불러 모을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만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던 극적인 우승을 이루어낸 1984년을 기점으로 폭발한 부산의 야구열기가 있었고, 1985년 10월에 완공된 3만 석 규모의 사직야구장이 그 열기를 그득히 받아내는 그릇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1984년의 우승 뒤 무려 6년 동안 가을야구에서 소외된 채 입맛만 다셔야 했고, 1989년에는 1984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롯데와 부산 야구의 상징이기도 했던 최동원을 쫓아내듯 떠나보내는 자책골로 끓어오르던 열기에 찬물이 끼얹어지기도 했다. 최동원만큼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투수도 찾기 어려웠고, 최동원에 이어 떠나보냈던 김용철만큼의 파괴력을 보여주는 타자도 다시 만나기 어려웠다.

1991년, 부산야구의 두 번째 봄

▲ 사직야구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열기를 자랑하는 사직야구장. 기억 속의 1984년과 1992년을 넘어 또 한 번의 연료가 주입될 시점이 되고 있다. ⓒ 롯데 자이언츠


1991년, 부산야구에는 다시 봄기운이 돌아왔다. 박동희가 14승을 올리며 아마추어 시절부터 달고 다니던 '제 2의 최동원'이라는 수식어가 야구팬들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시즌 2승으로 삐끗했던 윤학길이 17승을 기록하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거기에 3년차 김청수와 고졸신인 김태형이 각각 두 자리 승수를 올리며 롯데는 일약 네 명의 10승대 선발투수를 보유한 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타선도 제법 안정된 해였다. 4번 타자 김민호가 20홈런과 3할을 기록하며 중심을 잡았고, 투수에서 전향한 김응국이 3할과 25도루를 기록하며 짝을 이루었다. 거기에 타격의 달인 장효조가 부활하며 3할 4푼대의 고타율로 제 2의 전성기를 시작했고, 신인 박정태와 전준호가 각각 타점과 도루로 팀을 이끌며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특히 속 터지도록 느긋했던 강병철 감독의 배짱은, 막 피어오르는 숯불 같던 선수들의 열기와 어우러지면서 묘하게도 그 해만큼은 궁합이 맞았다. 역전패를 거듭하면서도 선발 로테이션은 무너지지 않았고, 선수들 역시 오늘 지면 내일 이긴다는 자신감으로 조급한 모험을 자제했다. 그렇게 롯데의 전력은 오히려 후반기가 되면서 더 단단해져갔고, 8월 14일에 반 경기차로 앞서가던 LG를 잠실에서 5대1로 잡고 4위로 올라선 뒤 한 번도 그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채 시즌을 완주해내며 가을야구의 티켓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물론 그 해도 마땅한 마무리투수를 만들지 못한 약점은 여전했고, 그래서 시즌 내내 최강의 자리를 넘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매 경기 희망의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고, 지더라도 허탈하게 경기장을 빠져나오지 않을 수 있었던 그해, 부산의 팬들이 야구장을 찾는 발걸음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윤학길과 장효조의 타이틀 싸움

윤학길과 장효조가 벌였던 타이틀 싸움도 한 가지 볼거리였다. 윤학길은 지긋지긋하게 많은 역전패와 1실점 패전을 기록하면서도 선동렬과 다승왕 다툼을 벌였다. 특히 장효조는 빙그레의 이정훈과 타격왕 타이틀을 놓고 1리 차의 현미경 싸움을 벌여나갔다.

특히 백만관중을 달성한 그 역사적이었던 9월 15일에 날렸던 결승 홈런으로, 장효조는 3할4푼 5리까지 타율을 끌어올리며 4년만의 타격왕 복귀를 눈앞에 두기도 했다. 그는 그날 경기 후 기자들 앞에서 17일과 18일 대전에서 치러질 시즌 최종전에 나서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3리 차로 앞서있던 수위타자 이정훈의 소속팀 빙그레 이글스의 투수들이 좋은 공을 줄 리 없고, 그러다 보면 대구상고 선후배 사이에 좋지 못한 모습을 연출하게 될 것이라는 걱정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틀 뒤 롯데의 강병철 감독은 굳이 장효조를 타석으로 내보냈고, 빙그레의 김영덕 감독은 이정훈을 벤치에 잡아 두었다. 그리고 첫 타석에서 안타를 내주며 1리 차까지 추격을 허용한 송진우는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타석과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선 장효조에게 연달아 볼 네 개를 던졌고, 그 뒤를 이은 장정순이 또다시 한 개의 볼 넷을 내주었다. 그 이튿날은 장효조도 더 이상 타석에 나타나지 않았고, 이정훈은 개운치 못한 뒷맛을 다시며 타격왕에 올랐다.

물론 그 해는 선동렬과 장종훈이 투수와 타자 부문 개인 타이틀을 휩쓸어가다시피 했고, 결국 롯데에서 따로 소득을 챙긴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을 향해 '우리 아무개가 최고다'라고 핏대 올릴 기회를 준다는 것만으로도 홈 팬들에게는 엄청난 즐거움이며, 힘이고 위로라는 사실은 구단과 선수들도 기억해야 할 일이다.

짧았던 꿈, 하지만 또 다시 처절했던 롯데의 가을 야구

▲ 박동희 1991년과 1992년, 롯데 자이언츠의 두 번째 전성기를 이끈 투수. 또 한 명의 최동원, 혹은 선동렬이 될 것으로 믿었던 기대, 그리고 사상 최고의 강속구를 던졌던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슈퍼베이비'로 불리곤 했다. ⓒ 롯데 자이언츠


그렇게 7년 만에 올라선 가을 무대에서 만난 첫 상대는, 6년 전 한국시리즈에서 만났던, 그리고 그 뒤로도 세 번을 더 만나며 만날 때마다 혈전을 벌이게 되는 가을의 숙적 삼성 라이온즈였다. 그 해 삼성은 16승과 18세이브를 기록한 김성길을 중심으로 11승의 유명선과 10승의 이태일, 그리고 9승의 최일언과 8승의 성준이 마운드를 구성하고 있었다. 선발진의 무게감은 롯데만 못해도 선발과 마무리 양쪽에서 중심을 잡아준 김성길이라는 확실한 에이스 카드를 가진 점을 생각하면 어느 쪽이 낫다고 쉽게 말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타격 면에서는 삼성이 압도적인 우위에 서 있었다. 아직은 전성기를 끝내지 않은 이만수가 있었고, 신경식, 허규옥, 강기웅, 김용국, 류중일, 장태수 등 주전급 야수들 모두가 3할 언저리에 늘어선 채 투수진을 압박했다. 박승호, 이종두, 정성룡 같은 백업멤버들도 언제든 기회만 주어지면 3할을 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파괴력을 무기로 롯데와의 상대전적에서도 12승 1무 5패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물론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다 보니 3, 4위 팀이라고는 하지만 팀 간 승차도 무려 8경기나 벌어져있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 그것도 먼저 단 두 번의 승리만 잡아내면 끝나는 초단기전 승부는 또 다른 것이었다. 6년 전 최동원의 어깨 하나로 4승을 잡아냈던 롯데가, 이번에는 윤학길과 박동희의 힘을 빌어 두 경기쯤 잡아내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그것은 부산팬들만의 생각일 뿐, 많은 전문가들과 외지의 야구팬들은 싱거운 삼성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막이 오르고, 9월 22일 대구에서 열린 1차전은 삼성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5회까지는 롯데가 3대 2로 앞서가며 근근이 버텼지만, 삼성은 5회 말 김종갑, 김용국, 신경식이 연달아 2루타, 3루타, 2루타를 때려내며 단숨에 전세를 뒤집은 뒤 다시 김용철의 적시타로 신경식마저 불러들이며 5대 3의 승기를 굳히기 시작했다. 그 뒤 6회에는 류중일이 홈런을 날렸고, 장태수가 다시 2타점 적시타를 때리며 8대 3의 승부를 완성했다. 삼성은 성준과 김성길을 투입했고 롯데는 박동희에 이어 김태형과 김청수를 소모한 경기였다.

하지만 이튿날 곧바로 부산으로 옮겨 치러진 2차전을 윤학길이 잡아내며 롯데가 기사회생했다. 뒤를 받쳐줄 투수가 아무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윤학길은 8회까지 3안타만 내주며 역투했고, 근성의 타선은 1회부터 타자일순하며 5점을 뽑아내 그런 윤학길을 측면지원했다. 10대 2의 설욕.

문제는 이틀 뒤 다시 대구로 돌아가 치른 마지막 결전, 3차전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그날의 결전에 양 팀은 성준과 김태형을 선발로 내보내며 탐색전을 벌였다. 하지만 동시에 양팀의 타선은 1회 초 김민호, 1회 말 류중일이 홈런을 때려내며 서로의 레이더를 꺾어버렸다. 결국 김성길과 박동희가 1회와 2회부터 각각 불려나와 제대로 맞붙는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경기는 김성길은 12.1이닝을 1실점으로, 박동희는 10.2이닝 동안 15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1실점만으로 막아내는 절정의 투수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연장 13회까지 4시간 37분의 혈투를 벌이고도 결론은 무승부였고, 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추가경기'를 치를 수밖에 없게 됐다. 

4차전은 이튿날 곧바로 이어졌다. 하지만 준비된 일정 동안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은 롯데는 6년 전의 어느 순간처럼 또다시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박동희는 바로 전 날 10.2이닝을 던졌고, 윤학길 역시 8이닝을 던진 것이 불과 사흘 전이었다.

게다가 26일 대구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까지 첩첩산중을 앞에 두고 이미 하루 일정을 넘긴 준플레이오프를 하루 더 쉬어갈 수는 없었다. 삼성은 제 2선발 유명선을 내세웠고, 롯데의 선택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불러낸 왕년의 에이스 김시진이었다. 하지만 그 해 김시진은 단 2승에 6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을 뿐인 퇴물이었고, 역시 1회를 버티지 못한 채 실점하고 김태형으로 교체되어야 했다.

의외로 3회 초에는 롯데 타선이 유명선을 공략해 2안타와 볼넷 2개를 묶어 두 점을 뽑아내며 역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한 점 차의 리드를 지켜내야겠다는 강병철 감독의 조바심이 4회 말부터 아직 성치 못한 어깨의 윤학길을 불러냈고, 결국 최동원이 될 수는 없었던 윤학길이 6회 말에 김용철에 역전홈런을, 그리고 8회 말에는 류중일과 장태수에게 백투백 홈런을 맞으며 무릎을 꿇게 된다.

1991년의 값진 패배, 1992년의 달콤한 승리로 돌아오다

끝까지 가봐야 새로운 출발점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적당한 곳에서 멈추는 이에게는 돌아올 내일 역시 적당한 무언가일 뿐이다. 그 해 그렇게 하얗게 불태운 롯데의 투혼은 스스로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쳤고, 동시에 최고의 자리까지 남은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게 했다. 그리고 이듬해 염종석이라는 걸출한 신인이 합류하고, 박정태와 전준호와 공필성이 다시 한 걸음씩 성장하며 그 빈자리를 말끔히 채워낼 수 있었다. 1992년, 롯데의 두 번째 우승과 120만 관중 기록은 1991년의 거름 위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2007년과 2008년을 지나면서 한국프로야구가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한때 12만까지 쪼그라들었던 부산야구는 138만을 넘어 150만 관중시대를 겨냥하고 있고, 한국야구 역시 592만 기록을 딛고 600만 관중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각 구단의 입장에서야 우승인가 백만 관중인가, 그래서 더 많은 승리인가, 더 많은 팬서비스인가를 놓고 가늠하며 고민할 만하다. 하지만 팬들의 가슴을 더 강하게 뛰도록 하는 것은 가진 것을 다 털어 넣는 승부, 그래서 손끝으로 한계지점을 짚은 채 엎드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마지막의 한 장면이다. 그것이 한 경기든, 한 시즌이든, 아니면 하나의 선수단, 하나의 구단 전체의 운영이든 말이다.

▲ 1992년, 롯데 자이언츠의 두 번째 우승 1992년, 롯데 자이언츠는 120만 관중 앞에서 두 번째 우승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그 1992년은 1991년이라는 질 좋은 거름 위에서 피어난 꽃이었고, 그 연장선상에 놓인 해였다. ⓒ 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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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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