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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춤 '블랙 스완' 관객을 압도하다

[영화로 읽는 세상이야기 68] 흑조를 탐한 백조의 핏빛 도발과 균열 <블랙 스완>

11.02.15 16:56최종업데이트11.05.24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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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차이코프스키의 대표적인 발레곡인 '백조의 호수'는 발레의 교과서로 불립니다. 불명의 사랑과 불멸의 춤을 추는 '백조의 호수'는 곧 발레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세 독일의 전설에 바탕을 둔 '백조의 호수'는 전 4막 29장 36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지금은 전곡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6곡을 뽑아 모음곡 형태로 공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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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의 호수'가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한 명의 발레리나가 청초하고 순수하며 우아하고 아름다운 백조(오데트)와 함께 정반대의 캐릭터인 도발적이고 사악하며 격정적이고 치명적인 흑조(오딜)를 동시에 연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다보니 오데트와 오딜은 발레리나가 선망하는 최고의 배역으로 손꼽힙니다.

모든 발레리나들의 꿈과 목표는 하나입니다. 절대적 경지에 올라 완벽한 춤을 추는 발레리나, 즉 '발레리나 아졸루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클래식 발레와 로맨틱 발레의 결정체로 평가받는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와 흑조를 통합하는 여왕 백조로. 그 '발레리나 아졸루타'가 되기 위한 한 발레리나의 욕망과 균열의 잔혹한 비극을 환상적인 춤사위에 펼쳐 놓으며, 숨 막히는 긴장감과 서스펜스로 관객들을 압도하는 영화 <블랙 스완>이 지난 11일 시사회를 가졌습니다.  

절대적 경지의 춤을 추기 위한 발레리나의 욕망

영화는 '백조의 호수'의 애잔한 서곡이 흐르는 가운데 오데트가 마법사 로스바르트로의 마법에 걸려 백조로 변하는 프롤로그로 오프닝을 엽니다. 이윽고 여왕 백조를 염원하는 발레리나 니나(나탈리 포트만)가 간절한 꿈에서 깨어 나 백조와 같은 우아한 차림으로 지하철을 타고 뉴욕시립발레단으로 갑니다. 터널 창문에 흑조와 같이 검게 비치는 니나의 모습은 영화의 헤드카피, '흑조를 탐한 백조의 핏빛 도발'을 상징적으로 암시합니다.

'백조의 호수' 공연을 앞두고 예술감독 토마스(뱅상 카셀)는 이전의 여왕 백조 베스(위노나 라이더) 대신 새로운 프리마 돈나를 캐스팅하겠다고 발표합니다. 베스는 분장실의 집기를 때려 부순 뒤 문을 박차고 나가고 니나는 몰래 베스의 빨간 립스틱을 슬쩍 챙깁니다. 여왕 후보들끼리 오디션을 받는 가운데 토마스는 니나에게 백조로는 최고지만 흑조는 무리라며 일갈합니다.

스완 퀸을 발표하는 날. 흑조 연기를 제대로 못 해 캐스팅에서 떨어진 줄 알았건만 니나는 새로운 여왕 백조로 뽑히며 찬사와 시기를 한 몸에 받습니다. 화장실로 가 엄마에게 이 사실을 전화로 알리며 울먹인 뒤 문을 나서는데, 누군가 거울에 빨간 립스틱으로 '매춘부'라고 써 놓았습니다. 과연 누가 니나의 등 뒤에 비수를 꽂으려 하는 걸까요?

이때부터 영화는 프리마 돈나가 된 니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클로즈업합니다. 하지만 신이 빚어낸 초월의 경지에서 완벽한 춤을 추기 위한 니나의 열정이 비등해질수록 '발레리나 아졸루타'에 짓눌린 그녀의 욕망은 끔찍한 정신분열로 증폭되며 예상치 못한 비극을 향해 치닫기 시작합니다. 그와 함께 영화는 엄마와 딸의 집요한 애증을 한 축으로 삼고 한 떨기 백합같은 발레리나들의 살의(殺意)를 또 다른 축으로, 욕망의 민낯을 씻어냅니다.  

흑조를 탐하는 백조의 도발과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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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종일관 잔잔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백조의 호수'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는 정경을 OST로 차용합니다. 그리고는 교교한 달빛이 반사된 호숫가를 거닐듯 아득한 날개 짓을 펼치는 백조가 어떻게 거친 폭풍이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사악한 정기를 내뿜는 흑조로 변신해 가는지를 발레와 스릴러의 조합이라는 낮선 질감으로 빚어냅니다.

신입단원으로 '백조의 호수'에 합류하는 릴리(밀라 쿠니스)는 첫 만남에서부터 니나를 자극합니다. 흑조의 양 날개를 등에 문신한 릴리는 정교한 기교나 연기력은 부족하지만 날 것 그대로의 싱싱함과 관능미로 토마스의 시선을 빼앗아갑니다. 반면 니나는 뛰어난 표현력과 테크닉으로 순수하고 우아한 백조를 소화해 내지만 교과서적인 춤은 그녀의 흑조를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런 니나를 향해 토마스는 릴리를 대입하며 사사건건 몰아붙입니다. 마치 한 번 발길이 닿으면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거미줄을 쳐 날벌레를 집어 삼키는 것 같은 릴리처럼 온 세상을 유혹하라고 주문합니다. 이윽고, 수도승 같은 엄격함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온 니나는 릴리와 함께 술과 마약에 흠뻑 절은 광란의 밤을 보내며 스스로를 향해 유혹과 금기의 손길을 뻗칩니다.

또한 이 대목은 니나와 엄마 간의 애증의 사슬이 끊어지는 분기점이 되기도 합니다. 다 큰 딸을 '이쁜이'로 부르는 엄마는 니나의 세계를 설계한 장본인이자 모든 통제와 절제와 금욕의 뿌리입니다. 28살에 니나를 갖고 싱글맘이 되면서 발레리나를 포기한 엄마에게 니나는 존재의 이유이자 삶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니나가 여왕 백조에 대한 중압감을 견디지 못해 자해를 일삼고, 긁은 등에서 검은 깃털이 돋으며 흑조로 분한 자신의 환영을 목격하면서 백조에서 흑조로 변신하고 있다는 망각은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니나는 '발레리나 아졸루타'로서 절대적 춤사위를 펼치고, 그녀를 해체하는 균열과 파괴도 개시됩니다.  

마침내 '발레리나 아졸루타'를 현현하는 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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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역작 '백조의 호수'를 제 것으로 탐하기 위한 니나의 강박과 혼돈은 베스를 향한 집착으로 전이됩니다. 프리마 돈나로서 '백조의 호수'의 모든 것이었던 베스는 니나에게 여왕 자리를 물려주고 신경질적인 발작을 일으킵니다. 니나가 프리마 돈나로 등극하는 밤, 베스는 차도에 뛰어들어 두 다리가 부러지고 갈가리 찢기는 중상을 당합니다.

베스는 니나의 결말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니나와 똑같은 길을 걸어 온 베스에게 '백조의 호수'를 떠난다는 것은 절망이자 악이며 죽음입니다. 마치 '백조의 호수' 원곡에서 오데트와 지크프리트 왕자가 이승에서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듯이. 춤과 다리 등 모든 것을 잃어버린 베스는 병실에서 침잠한 부유물마냥 잿빛 흔적으로만 남습니다.

한편 니나는 베스가 프리마 돈나 시절 아꼈던 소지품을 쓰면서 베스에 대한 흠모와 존경을 대신합니다. 하지만 강박과 망각의 불길한 기운이 그녀를 휘감으면서 베스는 끔찍한 최후를 맞습니다. 니나는 "릴리가 여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한다"며 울먹이고, 베스는 "넌 내 걸 빼앗아 갔다"며 손톱손질 칼을 집어 들고 오히려 자신의 얼굴을 쑤셔댑니다. 그런데, 기겁을 하고 도망쳐 엘리베이터에 오른 니나의 피 범벅이 된 손에 칼이 쥐어져 있습니다. 

다음 날, '백조의 호수' 첫 공연입니다. 간밤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니나의 분열은 가속도를 높이고 공연 중 환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실수를 저지릅니다. 분장실로 쫓아 온  릴리는 자신이 대신 하겠다며 몸싸움을 벌이고 니나는 깨진 거울조각으로 릴리를 찔러 죽입니다. 그와 동시에 니나의 눈과 손끝부터 점차 흑조로 변하면서 2막의 마지막, 발레리나 기술 중 최고라는 연속 32회전 푸에테를 춥니다.

흑조가 백조를 압도하면서 마침내 니나는 '발레리나 아졸루타'를 현현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백조와 흑조의 합일은 예술적 승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완벽을 향한 강박으로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과정이며, 젊은 예술혼의 붕괴이자 백조의 죽음입니다. 그만큼 엔당 크레딧을 앞둔 반전은 충격적이며, 잔혹합니다.

극찬을 해도 아깝지 않은 나탈리 포트만의 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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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혈된 눈빛에 균열이 가고 이윽고 검붉은 피눈물을 흘리며 산산이 부서져가는 니나 역의 나탈리 포트만은 메소드 연기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영화 <레옹>의 꼬마 숙녀였던 마틸다가 단지 배역을 연기하거나 정형화된 연기를 뛰어 넘어 니나의 정신과 육체에 완전히 합일해 내뿜는 포트만의 카리스마는 영화의 진실성을 극대화시키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녀의 연기는 소름끼치도록 압도적입니다.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뛰어 넘으며 형식을 구축하고 또 다시 형식을 파괴하는 춤의 역사는 그것이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든 반(反) 발레의 기치를 내건 이사도라 덩컨의 현대무용이든 가사에 고깔을 쓰고 긴 장삼을 휘날리며 소매 자락을 흩뿌리는 승무든 치열한 육체의 기록이자 살아 있는 예술이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습니다.

영화 <블랙 스완>은 인간의 맨몸뚱이로 인간의 혼을 담아내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 춤이라는 사실을 니나의 발끝과 손끝에서 이른 아침 호숫가에서 실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고혹적인 백조와 관능적인 흑조로 증명해 냅니다. 그것은 최종 리허설 때, 토마스가 니나에게 격정적으로 주문했듯이 '자신의 꿈을 만져 본 마지막 춤이며, 가슴이 산산조각이 나 으스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보에의 아름답고 애절한 선율로 시작해 하프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화음이 흐르는 '정경'을 따라 오데트와 지그프리트의 영혼이 영원한 사랑으로 합일되는 마지막에 이르러 니나는 마지막 숨을 토해 내듯이, 말합니다.    

"난 느꼈어요, 완벽함을 느꼈어요. 나는 완벽했어요."

덧붙이는 글 2월 24일 개봉
블랙 스완 백조의 호수 나탈리 포트만 차이코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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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열의 영화로 읽는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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