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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카츄사'에서 '권번의 기생'으로

[한국영화스타 2] 최초의 영화 스타 이월화

04.10.08 17:23최종업데이트04.10.1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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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월 4일자 <조선일보>에는 잊혀진 한 여배우에 대한 기사가 났다. '말썽 많든 여배우 이월화-명성 울리던 토월회 여우, 극단 떠나서 기생생활'이란 제목의 기사에는 영화에서, 토월회 무대에서 인기를 한몸에 받던 이월화의 근황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전략) 시내 와룡동으로 이월화를 찾아가니 어제와는 딴판으로 비단옷으로 몸을 감은 그는 아직도 요염한 자태가 사라지지 않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중략)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면 아무리 해도 돈이 드니까요. (중략) 결국은 이런 기생노릇까지 합니다 그려." (후략)

 <월하의 맹서>로 스타가 된 이월화
이월화(李月華, 1904~1933)는 여배우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 무대에 선 선구적 인물 중 하나였다. 초창기 무대극에서는 모든 여자 역할을 남자배우가 했다. 여배우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일례로 <이수일과 심순애>로 더 잘 알려진 <장한몽>에서 심순애 역은 예쁘장한 남자배우 고수철이 연기했다.

최초의 여배우는 1917년 개량단의 김소진이었다. 하지만 최초의 여배우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게 그 활동은 미미했다.

두 번째이며 영화에 최초로 출연한 여배우는 궁중나인 출신으로 당시 4대 극단 중 하나인 취성좌의 주인이었던 마호정이다. 마호정은 계모나 소첩 등 악역을 잘 했다. 그러다 보니 취성좌의 공연에서 마호정은 계모역을 하고 여주인공은 남자인 최여환이 했다.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는 콜레라 전염을 막기 위한 홍보용 영화를 취성좌를 통해 만들게 했다. 이 영화에 출연한 마호정은 최초로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가 됐다.

1923년 윤백남은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月下의 盟誓)>(1923년)를 만든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저축 장려를 목적으로 윤백남이 이끄는 민중극단에 의뢰하여 만든 작품이었다.

1919년부터 만들어진 영화는 연극 도중에 연극에서 표현하기 힘든 장면을 영화로 보여주는 연쇄극(키노드라마)의 한 부분이었다. 본격적인 극영화인 <월하의 맹서>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이월화는 여배우가 드물었던 시기에 영화 한 편 출연으로 한국영화사상 최초의 스타가 됐다.

배우가 되기 전 이월화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본명이 이정숙으로 알려져 있으나 홍소회라는 설도 있다. 1933년 <동아일보>의 이월화 부고 기사에는 그녀가 진명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이월화는 1921년 김도산의 신극좌에 들어가 배우가 됐다. 그해 소녀들로만 구성된 여명극단으로 옮겨 <운명>을 공연하는 중 민중극단을 이끌던 윤백남의 눈에 들게 된다.

윤백남은 이정숙의 이름을 이월화로 바꿔주고 민중극단 두 번째 작품인 <영겁의 처>에 출연시켰다. 이월화는 그 작품에서 '올가' 역을 맡아서 유명해졌고 영화 <월하의 맹서>로 2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1923년 토월회가 창립되면서 이월화는 토월회의 여배우로 무대에 선다. 동경유학생 출신이었던 박승희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토월회는 신파극이 아닌 리얼리즘극, 곧 신극을 공연했다. 여배우가 귀하던 시절 이들은 당시 최고 스타 이월화를 여배우로 스카우트했고 이월화가 출연한 토월회의 공연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됐다.

이월화는 <부활> <사랑과 죽음> <카르맨> <하이델베르크> 등 초창기 토월회의 작품에 여주인공을 맡으며 승승장구해 '조선의 카츄사('부활'의 여주인공)'으로 불렸다.

하지만 몰락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박승희에게 구애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토월회 무대를 등지고 부산으로 내려가 이경손이 만든 영화 <해의 비곡>(1924년)에 출연했다. 방황의 시작이었다.

부산에서의 두 번째 영화 출연을 거절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윤백남이 만든 영화 <운영전>(1925년)에서 배역을 맡지 못했다. 또한 안석영에 대한 구애도 실패했다.

고국을 떠나고 싶었던 이월화는 대구의 한 부호의 아들과 결혼하여 상하이로 떠났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파국으로 끝났고 이월화는 이후 중·일 혼혈 청년 이춘래와 만났다. 하지만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이월화가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즈음 상해에서 돈이 떨어진 이월화는 다시는 밟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그녀는 <뿔 빠진 황소>(1927년), <지나가의 비밀>(1928년)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나 조역으로 만족해야 했다.

특히 <지나가의 비밀>을 촬영하고 있을 때에는 조선 권번에 기적을 올린 기생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조선 최고의 스타였던 이월화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기생으로 추락한 것이다.

스크린에서, 토월회의 무대에서 뭇사람을 녹이고 울리고 웃겼던 '조선의 카츄사'가 기생이 되어 대낮부터 웃음을 팔았다.

1933년 7월 18일 이월화가 죽었다. 이춘래와 함께 일본 모지로 옮겨가 살았던 이월화는 노모의 병 문안차 서울에 다녀간 지 일주일만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불과 나이 30살이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김갑의, <춘사 나운규 전집>, 집문당, 2001
김영무, <무성영화 시절의 스타들과 유명변사 해설 모음집>, 창작마을,2003
김종원 외, <우리 영화 100년>, 현암사, 2001
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현대미학사, 1998
호현찬, <한국영화100년>, 문학사상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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