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에테르 위로 떠다니는 열 세 살

이와이 순지 감독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

01.11.12 00:36최종업데이트01.11.1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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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이름이 영화의 내용과 방향을 대충 짐작케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런 감독들 중 하나가 이와이 순지지요. 우리가 합법적으로 볼 수 있었던 영화는 <러브레터>와 <4월 이야기> 단 두편 뿐이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디오 상영회와 인터넷 영화파일로 그의 다른 작품들을 보았습니다.

그의 세계는 대충 밝은 쪽과 어두운 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일반 개봉되었던 <러브레터>, <4월 이야기>외에 <불꽃놀이, 앞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 같은 영화가 전자라면, <스왈로우 테일>, <언두> 등은 이상하게 암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후자의 영화입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역시 후자에 속하는 이야기지요. 그러니 <러브레터>의 뭉클한 사랑이야기를 기대하시는 분들은 일찌감치 이 영화에서 떨어지십시오. 영화는 가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리얼해서 눈을 돌리고 싶게 합니다.

유이치와 호시노는 중학교에 입학해서 만난 친구입니다. 처음에는 호시노의 집에도 놀러가고 잘 어울려 지냈지만, 여름방학에 오키나와로 여행하고 온 이후로 호시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전교 7등이었던 모범생이 같은 학교 여학생에게 원조교제를 시키고는 돈을 뜯어내고, 한밤중에 유이치를 불러내서 이유 없이 때리는가 하면,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자위를 하게 합니다. 호시노가 이렇게 변한 이유는? 전혀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남자친구와 그의 아들과 함께 동거하는 비정상적인 가족. 친하다고 믿었던 친구가 가하는 폭력과 따돌림, 친절하긴 하지만 결코 학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들.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이치는 가수 릴리 슈슈에게 빠져들고, 릴리 슈슈의 팬사이트 '릴리홀릭'에 집착합니다. 오직 릴리 슈슈의 노래만이 괴로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어주는 도피처이니까.

순지의 영화를 설명하는데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가 '감성', '감수성' 입니다. 분명한 스토리를 세우는 것 보다 감수성과 분위기로 이끌어가는 이야기를 주로 만들기 때문이겠죠. 이 영화 역시 그렇습니다. 어딘가 붕 떠있고, 이곳에도 저곳에도 속하지 않은 내성적인 열 세살 소년의 지옥같은 중학생활을 찬란한 햇살과 파란 논이 펼쳐진 예쁜 농촌마을에 펼쳐놓는겁니다. 잔인하죠?

또래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오직 릴리 슈슈에게만 모든 것을 집중하는 유이치의 모습은 자신의 스타에게만 열광하는 십대 팬의 축소판 같습니다. 거기에는 현실로부터 도망가고자 하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괴로운 중학생활을 잊으려 릴리 슈슈를 듣는 유이치와 알고싶지 않은 현실에서 도망치려고 어두운 영화관 의자에 파묻힌 나. 생각 외로 길었던 영화를 보다가 문득 겹쳐진 모습이었습니다.
2001-11-12 00:31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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