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박한 미래에 극장을 찾을 관객들에게
 
<바람의 세월>을 보았습니다. 글을 써서 영화를 소개해야 하는데 손가락을 놀리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해마다 4월 그날이 가까워지면 마음이 불편해서인지 켕겨서인지 면피용으로 관련된 영화들을 소개하는 글을 꾸준히 써오긴 했습니다만, 이게 보통 난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 1년이 지나 되돌아온 숙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심지어 2024년은 참사로부터 1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지금껏 적지 않은 4.16 관련 영화를 보아왔습니다. 여기에 그저 새로운 작품목록이 하나 추가되는 데 불과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참사가 발생하고 나서 가장 먼저 나왔던 <다이빙벨>부터 시작해 10년 동안 참 많은 작업이 차곡차곡 쌓여 왔습니다. 어떤 작품은 시의적절했지만, 시간의 풍화 속에서 유효수명을 다하기도 했고, 어떤 작품은 부당할 만큼 들인 정성과 의의가 무색하게 외면당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런 작품들은 언제고 먼지 가득한 창고 속에서 재소환되어 가치를 존중받을 기회가 생길 터입니다. 하지만 그에 반비례해서 함부로 차용되면 안 될 고통과 슬픔을 낭비 또는 소모하는 작품도 종종 있긴 했습니다.
 
물론 고생해가며 당사자들과 연대하고 위로하며 함께 한 작가들의 작품이 훨씬 많습니다. 주마등처럼 그 작품명단이 머릿속을 스쳐 갑니다. 어떤 이는 살아 있지만 죽는 것보다 못한 이후의 일상에 포박된 생존자들을 조명했고, 어떤 이는 고통과 소외에 괴로워하던 이들 곁에서 함께 하려 애쓰던 소중한 선인들을 주목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 때문에 정작 자신을 돌보지 않고 그들 곁에 함께 하려 애를 쓰며 무리한 나머지 세상을 떠나고 만 이들을 기념하는 작업도 소개된 바 있습니다.

어느새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는 그날의 의미와 교훈을 상기시키고자 의도한 작업도, 유독 청하지도 않았건만 돌아오는 사회적 참사들 가운데 4.16의 위치를 함께 놓고자 하는 성찰을 구현하려 한 작업도 등장했습니다. 무엇보다 떠난 이들을 잊지 못한 채 진상규명과 추모 활동에 매진하며 슬픔을 달래는 유가족들 곁을 떠나지 않았던 카메라들은 그저 피사체 대상이 아니라 연대의 의지로 굳건히 자리를 잡아왔습니다.
 
연대기적 구성의 기록영화
 
"바람의 세월"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바람의 세월"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시네마달

 
그런 결실들이 차고 넘침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도래해야 할 작업이 남아 있었습니다. 지난 10년간 미완으로 남아 있던 금단의 영역에 속하는 작업입니다. 바로 당사자들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작품입니다. 어떤 차별화된 결과물이 나올지 4.16 관련 영상화 작업을 지속해서 언급하고 소개해온 입장에선 무척 궁금했지만 차마 재촉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그저 기다리고 기다릴 뿐이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만에 그런 성격의 작업이 도착을 알렸습니다.

바로 <바람의 세월>입니다. '지성 아빠'로 더 익숙할, 유튜브 '416TV' 채널 운영자이기도 한 문종택 님이 지난 10년간 촬영한 5천여 개의 기록을 바탕으로 구성한 연대기적 구성의 기록영화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저 강산이 변해도 한참 변할 법한 시간 동안 축적된 아카이브 영상의 편집본처럼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입니다. 다큐멘터리라 해도 그저 무편집 자료 영상과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실의 조각들을 이어붙인다 해도 그 기준점을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작진의 관점과 의도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당사자라 해서 동일체가 되기란 불가능한 노릇입니다. 문종택 님도 그 지점을 많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입니다. 화면에서 본인 역시 유가족의 일원이자 상징적인 얼굴 중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등장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냥 스쳐 지나가거나 카메라 뒤에서 목소리로만 존재하곤 합니다. (본인이 담당한) 내레이션 역시 극도로 절제하고 또 절제된 톤으로, 의도적으로 국어책 읽듯이 건조하게 배치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금방 그 국어책 내레이션 속에서 꾹꾹 자물쇠 잠가놓은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감독은 분명하게 자신이 움켜쥔 카메라의 위력을 인지하며 촬영에 임하고 있었음이 확인됩니다. 잘 쓰면 약이 되지만 부정한 의도를 품는 순간, 카메라의 방향은 타인을 해치는 총구의 과녁과 동일한 지점을 향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죠.
 
영화는 104분 내내 그렇게 슬픔을 재료 삼되 오남용하지 않으려 하는 절제로 가득합니다. 아마 영화를 보고 나면 상영시간 내내 마치 배경음악처럼 빠지지 않는 흐느낌과 통곡, 분노의 절규와 처절한 토로를 체험하게 될 테지만, 감독의 카메라에 담겨 있던 극한의 슬픔에 비한다면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입니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누가 그 심정과 결단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아주 쉬운 일입니다.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회생활 가운데 하고픈 말을 온전히 다 끄집어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요. 게다가 세상 모든 이들이 그들의 억울함을 외면하고 이제는 그만하라며 눈과 귀를 닫아버리는 끔찍한 경험을 지난 10년의 대부분 동안 겪은 이들에게서 말입니다. 그들 각자의 흉중에 쌓인 투석 덩어리를 토해내지 못하며 어떻게든 관객과의 접점을 한 조각이라도 더 움켜쥐고픈 절절함을 어찌 측량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억제된 날것의 감각에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 이 영화를 소화하기란 절대로 만만하지 않은 고역입니다. 물론 감독은 최선을 다해 양보하고 또 양보했습니다. 이 영화에는 2014년 4월 16일 참사 당일과 이후 벌어진 과정 대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굳이 10년간 반복해 그날의 참극을 재현하지 않더라도 알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을뿐더러, 외면하고자 작정한 이들에겐 눈앞에 들이밀어도 보지 않으려 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생략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직접 목격한 참상에 비해서 화면에 드러나는 부분은 지극히 미세한 일부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유가족의 울분과 항의를 보는 게 불편한 이들에게 특히 이 부분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당사자들이 풀어내고 싶은 것 중 한 2%도 온전히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요. 역지사지의 지혜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최초로 유가족 당사자의 시선과 품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여기에 담긴 유가족은 결코 SF에 종종 등장하는 단일지성체 외계종족이 아닙니다. 각자의 개성이 넘치는 데다 지난 10년간 고난의 진상규명 활동 가운데 다른 관점으로 충돌한 적이 허다했던 이들입니다. 굳이 자극적으로 그런 갈등 부분을 부각하지는 않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처럼 종종 배치된 당사자들의 수다 타임이나 정제된 편집과 배치로 지난 세월 동안 갈라졌던 내부 이견에 대해 묘사하는 장면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어떤 유가족이 담담하게 토로하던 바대로, '우리 개인이 모두 각자의 소우주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다 보니' 개별의 관심사와 강조점에 따라 무수히 많은 충돌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바람의 세월>은 그런 솔직함을 감추려 하지 않고 끄집어내 살짝 공개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이 당사자성 덕분에 접근 가능한 희소한 지점 중 하나일 테죠. 왜냐고 하면 연대 단위는 그런 언급을 망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의 일이기에 용감하게 고백할 수 있는 셈이죠.
 
계속 마치 공포영화를 보다 무서운 장면에서 눈을 돌리거나 가리듯 회피하곤 했습니다. 구조된 단원고 학생들이 참사 후 첫 등교 때 유가족들이 생존한 아이들을 교문 앞에서 안아줄 때는 결국 첫 번째로 펑펑 울고야 말았습니다. 인두겁을 쓰고 도저히 참지 못할 순간이었으니까요. 1주기가 된 2015년 4월, 그 1년 내내 진상조사를 요구하지만 외면당해온 이들이 길바닥에서 쫓겨나고 배척당하는 찰나들을 필사적으로 곁눈질로 보는데 전체 분량 중 지극히 일부 시간만이 지났음을 확인하고 나서 낙담했습니다. 이걸 앞으로 어떻게 견딘담? 그런 심정이었죠. 이기적이지만 '타인의 고통'을 대할 땐 나 자신의 임계점을 넘기지 않으려 그렇게 되는 법인가 봅니다. 그렇게 그들이 겪은, 그리고 우리 중 일부는 차마 외면하지 못해 동정했고, 다수는 잊으려 애썼으며, 일부는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매도했던 시간이 차례로 흘러갑니다.

2016-2017년 촛불시위와 탄핵, 배반의 세월
 
"바람의 세월"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바람의 세월"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시네마달

 
2016-2017년 촛불시위와 탄핵의 순간이 깃듭니다. 그리고 배반의 세월이 시작됩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이제는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라 기대했지만 '희망 고문'만 이어졌습니다. 온전히 해소되는 게 거의 없다 보니, 기대치가 높아서인지 배반감도 더 커집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이제는 믿고 일상으로 돌아가도 되지 않냐며, 아직도 거리에서 그러고 있냐며 놀라곤 하는 비율이 늘어가던 시절입니다.

물론 타인들의 시각과 유가족의 생각이 같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쉽게 저울 위에 요구조건 목표치와 현실적으로 가능한 수준을 재곤 하지만, 시작부터 당연히 이뤄질 것이라 믿었던 조사와 후속 조치 중 무엇 하나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이들의 불신과 초조함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으니까요. 그걸 무시하기 시작하면 결국 우리는 편의적으로 망각을 좇게 됩니다. 유가족의 영화 속 관점은 명확합니다. '가만히 있으라!' 하는 말을 믿었다가 죽었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더라는 경험적 진리를 체득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도 계속 뒤통수를 맞고 길거리로 나와 악다구니를 써야만 상황을 알릴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영화는 그런 유가족의 판단을 입증하는 경로로도 활용됩니다.
 
카메라를 든 유가족으로서 감독의 고뇌는 굳이 감독 본인이 드러내지 않으려 하지만, 몇 차례 거듭 겪은 배신의 순간 가운데 간혹 포착됩니다. 단원고 교내에 있던 '세월호 기억 교실'이 철거될 때 자식의 유류품이 든 박스를 옮기려다 책상에 주저앉아 큼직한 박스 뒤에 얼굴을 숨긴 채 부르르 떨던 문종택 님의 영상은 차마 보기 힘들 지경입니다.

그리고 부도덕한 정부와 책임을 회피하는 사회가 끊임없이 유가족에게 가한 폭력들, 분열과 갈라치기 과정의 증거들이 속속 화면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폭식 투쟁'이라는 해괴망측한 야만적 폭거, 우리는 '노랭이'인데 왜 자꾸 '빨갱이'라 하냐며 웃고 넘기지만 지금도 이어지는 종북좌파 타령, 늘 유가족에게 결단을 요구하며 책임을 회피하지만 정작 제대로 해결할 의지가 없는 정치권에 대한 폭로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민낯을 기어코 붙잡아냅니다. 부끄러워하는 이들도 있지만 켕길 이들도 제법 있을 것입니다.
 
10년의 세월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나치독일의 홀로코스트는 전후 현재까지 수많은 문화예술 작품으로 기억됩니다. 그중에도 프리모 레비의 이름과 작업은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남겼습니다. 육신은 용케 살아남았지만, 인간성의 상실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자비한 외면,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상실감은 되돌릴 수 없기에, 생존자라도 그 주박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는 통찰입니다. 이후로 그의 말은 모든 '사회적 참사'에 적용되어 왔습니다. 그런 성찰과 기억의 힘을 잘 알기에 부도덕하고 무능한 권력이 그렇게 기를 쓰며 '참사'가 아니라 '사고'일 뿐이라며 억지 강변을 한 것이겠지요. 유가족들이 담담하게 말합니다. 노력하고 애썼지만 거의 모두 실패했는데 유일하게 성공한 게 합동분향소에 부착된 문구를 '사고'에서 '참사'로 1년 만에 교체한 거라면서 말이죠.
 
영화를 보고 나니 머릿속을 맴도는데 입 밖으로 꺼내기엔 망설여지는 '말'이 너무 많아서 주체하기 힘들어집니다. 영화 속 유가족들에 감히 비길 수 없겠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다들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슬픔의 공동체'를 통해서 도달한 사회적 통찰, 가까이는 1980년 5.18로부터 꾸준히 연결된 '국가폭력'과 '사회적 참사'의 교훈을 망실하고 외면하면 한국 사회는 후퇴했고,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 할 때마다 부족하나마 발전할 수 있었던 역사적 진실을 영화를 보게 될 이들이 공유하길 간절히 바라며 만들었을 테니, 누수 없이 제작진들의 의도를 이해하고 공감해야 할 밖에요.

그래야만 살아 있지만 죽기만 못한 채로 그분들을 남겨두지 않고 우리의 이웃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문종택 님도 넣을까 말까 망설였을 결정적 순간 중 하나이자 카메라를 든 이들의 숙명인, '내가 당신을 카메라로 찍는 도중에 죽으면 어떡하냐?'던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목격하고 나면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을 것입니다. 그런 삶과 죽음의 경계를 10년간 넘나든 이들 앞에서 우리는 겸허해야만 합니다.
 
국가는 구조에는 한없이 무능하다가도
책임 회피와 여론 조작에는 놀랄 만큼 유능했다
무책임은 조직적이었고 책임 방기는 집단적이었다
위로 대신 탄압하고 지원 대신 감시했다
 
- 2022년 9월 10일,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 中 -

영화의 후반에 어느 순간 이러한 문구가 화면 중앙에 자리를 잡습니다. 지난 10년간 우리가 목격하고 체험한 것의 총합에 가까운 내용입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온당한 해결을 가로막아온 이들이 그리도 기를 쓰고 온갖 부정한 술수로 진상규명을 은폐한 것은, 역설적으로 이 참사가 지극히 사회적인 주제라는 것을 증거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 전체가 그들의 고통을 나눠가며 치유하고 개선하지 않은 결과는 이태원 참사를 비롯해 그 후로도 무수히 발생한 사회적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이를 막기 위해 우리는 기억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바람의 세월>은 그들이 겪었던 온갖 바람을 견디며 살아남은 또다른 생존자들의 생생한 기록이기에 우리는 이 영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2024년 4월 16일이 다가옵니다. 2014년 그날로부터 3654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진실은 온전히 떠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더 나빠졌습니다. 우리는 그걸 잊지 않아야 합니다.
 
<작품정보>
 
바람의 세월 SEWOL: Years in the Wind
2024│한국│다큐멘터리
2024.04.03. 개봉│104분│12세 관람가
감독 문종택, 김환태
제작 연분홍치마
공동제작 다큐이야기
제작협력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공동배급 (주)시네마달, 연분홍프로덕션
바람의세월 416TV 세월호 문종택 김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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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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