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STORY 한국사 스토리텔링쇼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한국사 스토리텔링쇼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세종대왕은 조선사 최고의 성군으로 꼽힌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세종의 가족사는 불행과 비극의 연속이었다. 특히 며느리를 네 번이나 쫓아내야 했던 쇼킹한 왕실스캔들은, 성군의 면모에 가려진 세종의 대표적인 흑역사다.
 
6월 15일 방송된 tvN STORY 한국사 스토리텔링쇼 <벌거벗은 한국사>에서는 '세종대왕은 왜 며느리 넷을 쫓아냈나'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1427년 세종 10년 4월 26일, 세종의 장남이자 훗날 조선의 5대왕이 되는 세자 문종(이향)의 결혼식이 열린다. 이날은 세종과 조선에게 모두 큰 의미가 있었다. 당시 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이래 정종-태종-세종을 거치며 아직까지 적장자에 의한 왕위계승이 한 번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유교 사상을 따르는 조선에서 적장자인 문종의 결혼식은 정통성있는 왕위 계승의 기회를 상징하는 의미가 컸던 것.
 
문종은 아버지 세종의 그림자와 단명했다는 사실 때문에 허약하고 존재감이 없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의 문종은 아버지 못지않은 다재다능한 엄친아였다. <문종실록>에는 문종이 육예(여섯 가지 기초 교양), 천문과 역상(조선시대 과학과 천문학), 성률과 음운(언어학)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공부부터 예체능까지 두루 섭렵하고 못하는 게 없었다는 의미다.
 
문종은 자질과 능력이 매우 탁월한 데다, 지금까지의 조선 국왕 중 가장 체계적이고 철저하게 세자 수업을 받은 준비된 왕이었다. 그런 아들에 대한 세종의 기대도 남달랐다.
 
조선은 혼인을 중시했던 사회였다. 왕실로서도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개념에 따라 후계구도를 탄탄히 하기 위하여 혼인은 상징적인 과정이었다. 세종은 아들 문종을 위하여 며느리감을 고르는 데 무려 3년이나 심사숙고하며 공을 들였다. 그렇게 간택된 세자빈은 정3품 상호군 김오문의 딸 휘빈 김씨였다.
 
남편은 굳건한 정통성에 능력까지 갖춘 미래의 왕. 현재의 왕인 시아버지는 한국사 최고의 성군에다가 너그러운 애민의 군주로 알려진 인물이다. 당시의 여자라면 누구나 시집가고 싶어할 만한 최고의 조건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휘빈 김씨와 문종의 결혼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문종은 휘빈을 좋아하지 않았고, 아내보다 궁녀들과 더 가깝게 지냈다. 두 사람은 자녀를 만들 기회조차 없었다. 결혼 당시는 문종이 14세로 합방이 가능한 성인(15세)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고, 1년 뒤에는 휘빈의 할아버지가 별세하며 유교예법상 1년간 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합방이 불가능하다.
 
초조해진 휘빈은 양반가 첩의 딸 출신인 궁녀 호초에게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다는 민간 비술인 '압승술'을 따라하게 된다. 호초는 세자의 수발을 드는 궁녀 효동과 덕금의 신발을 태워 재로 만든 다음 세자의 술에 넣어 마시게 하는가 하면, 암수 뱀이 교미할 때 나오는 기운을 손수건에 묻혀서 가지고 있으면 세자를 혹하게 할 수 있다는 내용 등을 전했다. 이에 솔깃한 휘빈은 그대로 실행하며 세자빈으로서 절대 하지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비술은 실패했고 궁궐 안에 나도는 수상한 소문들은 결국 시아버지 세종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간다. 큰 충격을 받은 세종은 휘빈을 폐출시키고 호초를 참수한다. 사유는 투기(질투)와 음행(음탕한 비술)으로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중대한 이혼사유가 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삼강행실도(충신, 효자, 열녀의 이야기를을 모은 교훈서)까지 편찬할 만큼 충실한 유학군주였던 세종의 관념으로 세자빈의 비행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과 며느리

세종은 김씨를 폐출한 다음날 바로 전국에 금혼령을 내린다. 이는 각지에 국혼이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자 세종이 새로운 세자빈을 바로 간택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왕실의 배우자를 세 번에 거쳐 고르는 일을 삼간택이라고 한다
 
해당 대상은 10~15세까지의 처녀였고 이들은 지원서에 해당하는 간택단자를 제출해야 했다. 간택단자에는 첫째줄에 나이-사주 등의 개인정보를, 둘째줄에는 부친과 조부의 이름 및 관직을 기재하여 가문의 명성을 확인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소론-노론 등 해당 가문이 속한 당파의 정보까지 기재하여 가문의 정치적 성향까지 확인했다. 이렇게 모인 약 30여 명의 지원자들은 세 번의 간택을 거치며 후보를 추렸다.
 
초간택에서는 걸음걸이-절하기 등 기본 예절을 평가했다. 지원자들은 면접에서는 공정성을 위하여 노란 저고리에 붉은 치마로 복장을 통일했다. 재간택에서는 왕실의 어른들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를 통하여 교양과 예절을 평가했다. 재간택까지 통과한 3인은 최종관문인 삼간택에서 왕실 최고 어른들과 일종의 압박면접에 해당하는 질의응답을 통하여 성품과 현명함을 평가받았다.
 
조선 21대왕 영조는 직접 자신의 왕비를 뽑는 삼간택에 나서서 "세상에서 깊은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3인 중 두 여인은 각각 산과 물을 거론했다. 하지만 마지막 여인은 '사람의 마음'을 거론하며 "사물의 깊이는 자로 재어서라도 헤아릴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재기도 헤아리기도 어렵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영조는 그녀의 대답에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그렇게 삼간택을 통과하여 최후의 승자가 된 인물이 바로 영조의 계비이자 대왕대비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는 정순왕후(1745-1805)다.
 
한편 삼간택에서 탈락한 여인들은 평생 독수공방으로 살아야 했을까. 연구에 따르면 삼간택에서 떨어진 여인들도 혼인이 가능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유학에서 중시한 삼강(충신, 효자, 열녀)에 해당하는 인재들이 늘어나려면 혼인을 장려하여 자식을 낳아야 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두 번째 세자빈 간택에 나서며 이미 필수 요건으로 꼽히는 가문과 부덕(성품) 못지않게 인물(외모)를 강조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일부 신하들이 덕보다 얼굴만 보게 될 수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자 세종은 "잠깐 봐서 덕을 어떻게 확인하겠는가. 덕으로 뽑을 수 없다면 용모로 뽑을 수밖에"라고 대답했다고. 하지만 얼마후 세종은 자신의 경솔한 발언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된다.
 
그렇게 두 번째로 간택한 며느리는 순빈 봉씨였다. 세종은 봉씨에게 '열녀전'을 선물하며 모범적인 세자빈이 되라는 바람을 전한다. 하지만 순빈은 열녀전을 읽고 나서 뜰에다 던져버리며 "내가 어찌 이것을 배우고 생활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유교사회이자 전제군주 국가였던 조선 사회에서 순빈의 행동이 충격적인 것은, 바로 시아버지에 대한 불효인 동시에 왕에 대한 불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순빈은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로 각종 기행을 저질렀다. 순빈은 방에 항상 술을 준비해두고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셔서 몹시 취하기를 좋아했으며 만취하면 궁녀들을 구타하는 주사까지 부렸다.
 
심지어 순빈은 거짓 임신과 유산이라는 자작극까지 벌였다. 문종이 16세가 되었으나 봉씨가 아직 아이를 갖지 못했고 두 사람의 관계도 소원했다. 세종은 후계자를 위하여 특단의 조치로 명문가 출신 여성 3명을 세자의 소실(세자의 첩, 후궁)로 들였다. 소실 중 권씨가 먼저 임신을 하게 되자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까봐 불안과 질투를 느낀 순빈이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이 난 것.

놀랍게도 세종은 순빈의 기행을 최대한 묵인하려고 했다. 실록에 따르면 세종이 "두 번이나 폐출을 행한다면 더욱 나라 사람들의 눈과 귀를 놀라게 할 것이므로, 나는 이를 매우 염려하여 처리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휘빈 김씨의 전례에 이어 또다시 왕실에서 이혼을 시킬 수 없다는 부담도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와 세자가 몸소 집안을 올바르게 거느리지 못한 소치"
 
  tvN STORY 한국사 스토리텔링쇼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한국사 스토리텔링쇼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하지만 끝내 결정타가 된 것은 순빈과 궁녀의 동성애 스캔들이었다. 순빈은 궁녀 소쌍을 총애하여 강제로 희롱하고 번번이 동침을 요구했다. 실록에는 순빈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소쌍에게 화를 내고, 소쌍은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매우 다르게 하므로 나는 무섭다"라고 고백하는 대목이 나온다.
 
가계 계승이 불가능한 동성애는 혼인을 중시하는 조선 사회에서는 용납불가능한 결격 사유였다. 세종도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436년 10월, 두 번째 며느리 순빈 봉씨마저 폐하고 만다. 실록에서 세종은 "전에 김씨를 폐했는데 또 봉씨를 폐하게 되니 이것은 나와 세자가 몸소 집안을 올바르게 거느리지 못한 소치이다. 내가 마지못하여 세자빈을 폐출하는 뜻을 알리기 바란다"라며 자책했다. 세종은 세자빈의 기행과 그를 바로잡기 위하여 노력했던 과정까지 대신들에게 알리며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세종의 며느리 잔혹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세종은 장남 문종의 아내였던 휘빈과 순빈 외에도, 임영대군의 아내 남씨, 영응대군의 아내 송씨를 이혼시킨다. 세종은 남씨와 송씨가 병이 있다는 이유로 강제로 이혼을 밀어붙였다.
 
조선 사회에서 세자빈을 여러 차례 내쫓은 경우는 이후로도 전무하다. 백성에겐 애민의 군주로 알려진 세종은 왜 며느리들에게는 그렇게 냉정했을까. 당시 유교에서 '칠거지악(유교에서 남편이 아내를 쫓아낼 수 있는 일곱가지 사항)'에는 자식을 낳지못하는 것이나 유전병도 해당한다.

자칫 병으로 인하여 자손을 보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은 가부장적 유교사회였던 조선과 유학자인 세종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종에게 혼인의 중요한 의미는, 아들의 행복보다도 오로지 건강한 후손을 낳아 왕실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목적 뿐이었다.
 
이러한 세종의 며느리 잔혹사는 만기친람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세종의 성향과도 관련이 있었다. 다재다능했던 세종은 국정의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듯이, 아들의 혼인과 가정사조차도 자신이 돌봐야 할 국정의 연장선상으로 해석하고 개입하려고 했다. 이는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자식의 인생조차 손에 쥐고 흔들려는 극성스러운 '꼰대' 부모의 간섭에 가깝다.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한 성군 세종의 어두운 이면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병이 있다고 내쫓긴 남씨는 정작 70대까지 건강하게 장수했다는 것. 또한 송씨는 세종이 승하한 이후에 영응대군의 요구로 다시 재결합했으며 딸을 둘이나 낳았다.
 
세종은 결국 1년 전 딸을 낳은 경험이 있는 소실 권씨를 세 번째 세자빈으로 봉한다. 정작 세자 문종은 홍씨를 더 총애했으나, 세종은 이번에도 본인의 의지로 권씨를 세자빈으로 밀어붙였다. 세자빈 책봉 5년 뒤 결국 권씨는 아들을 순산하여 세종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가 바로 문종의 아들이자 훗날의 단종이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단종이 태어난 다음날, 권씨는 산후병으로 사망한다. 아내를 세 번이나 잃게 된 문종의 절망감이 얼마나 컸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문종은 이후 건강상의 문제와 아버지 세종의 상이 겹치면서 다시 아내를 얻지못했다. 문종은 역대 조선국왕 중 재위기간 내내 아내가 없었던 유일한 임금이다.
 
그리고 이는 어린 단종을 비호해줄 왕실의 어른과 외척세력의 부재를 초래하여, 훗날 세조의 권력찬탈로 이어지는 비극의 씨앗에도 영향을 미친다. 며느리를 4명이나 내쫓고 아들들의 가정사에 개입하면서까지 모범적인 왕실을 만들려고 했던 세종의 노력은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간 셈이다.
 
수많은 업적을 이루고 애민정치를 실천한 세종이지만, 며느리와 가정사 만큼은 죽는 순간까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수신제가 치국평전하라는 격언은 세종의 경우에는 오히려 정반대에 가까웠다. 왕으로서는 누구보다 훌륭했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는 지나친 집착과 엄격함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
벌거벗은한국사 세종대왕 순빈봉씨 휘빈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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