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연과 상상>에서 츠구미를 연기한 배우 현리.

영화 <우연과 상상>에서 츠구미를 연기한 배우 현리. ⓒ 이선필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을 주 무대로 살아온 이 배우를 최근 자주 접하게 된다. 본명은 이현리로 일본에서 10년 넘게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활동했던 그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우연과 상상>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갓 찾은 사랑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는 츠구미 역을 맛깔나게 소화했다. 애플TV의 야심작 <파친코>에선 일곱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배우 현리를 4일 오후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택시 안에서 친구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에게 남자친구에 대해 수다스럽게 떠들던 해맑은 에너지가 있어 보였다. 결국 여러 우연들로 엇갈리는 운명을 가게 되는 인간 군상을 다룬 <우연과 상상>을 상징하는 이미지라 해도 손색 없어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가 한국에 계셔서 한국과 일본을 많이 오갔다"며 "영화로 한국 관객분들과 만난다고 하니 새로운 감정이 든다"는 소회부터 그가 전했다.
 
두 명장의 서로 다른 현장
 
일본 영화의 명맥을 잇는 차세대 이야기꾼으로 평가받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는 벌써 세 번째 작업이다. 단편 <천국은 아직 멀어>로 인연을 맺은 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연출했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각본을 쓴 <스파이의 아내>, 그리고 이번 작품까지 출연했기 때문이다. 각각 일본의 거장, 신세대 감독을 모두 경험한 현리는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며 당시 작업의 기억을 소환했다.
 
"잘 알려진 대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님은 촬영 기간 만큼,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대본리딩에 할애한다. 배우들이 모여 감정을 뺀 채 대사를 읽어나가는 과정을 겪으면서 대사를 정확히 잘 외워야 현장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말을 새삼 실감했다. 원랜 제가 준비를 많이 해가는 편인데 이번엔 준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현장에서 감독님이 연기에 대해서는 특별히 지시하지 않고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연기하길 원하시거든. 영화에선 거의 10분 넘게 택시 안에서 대사를 하는데 특별히 어렵게 다가오진 않았다.
 
구로사와 감독님은 대본 리딩을 따로 하지 않고, 현장에서도 촬영을 정말 빠르게 진행하신다. 하마구치 감독님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의 대학원 제자인 걸로 아는데 이번 작품이 끝나고 구로사와 감독님이 제자의 작업 현장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시더라. <스파이의 아내> 때 제가 첫 부분에 강렬하게 등장해야 하는데 대사가 너무 적다며 제게 엄청 미안해하셨다. 그러면서 조명만 1시간 넘게 준비해주시더라. 그 장면이 인상 깊다고 해주신 분들이 많은데 감독님의 숨은 노고 덕이었다."

  
 영화 <우연과 상상>의 한 장면.

영화 <우연과 상상>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우연과 상상>을 통해 현리는 다시 한번 대사와 현장에서 몸을 쓰는 연기의 힘을 알게 됐다고 한다. "대본리딩 땐 잘 몰랐지만 현장에서 연기하는데 남자친구와 이별하는 과정에서 정말 억울해서 울 뻔했다"며 "츠구미 입장에선 불안해서 더욱 남자친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든 것"이라고 연기할 때 감정을 되짚었다.
 
영화에서처럼 실제 현리 인생에 전환점을 준 우연의 사건이 있는지 묻는 말에 잠시 생각하던 그는 "교환학생으로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마친 뒤 일본 일일 드라마 오디션을 봤는데 덜컥 붙었다"며 "그래서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그게 아니었으면 한국에서 쭉 연기를 했을 것 같다"고 답했다.
 
"연세대학교 교환학생이었는데 그때 소중한 친구도 만났고, 좋은 걸 많이 배웠다. 일본에선 연기학원이 많지 않기에 한국에서 연기를 배웠는데 평생 배우를 하겠다고 다짐한 것도 그 무렵이다. <파친코>도 한국에서 촬영했었다. 그만큼 한국에서 좋은 기억이 많다. <우연과 상상>을 만났을 때 일본 드라마 세 개를 연달아 하던 때라 엄청 바빴다. 연기 계획을 세우고 감정을 외운 채 현장에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하마구치 감독님 현장에서 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시간을 풍요롭게 갖고 연기하는 게 선물과도 같은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파친코> 내 얘기, 우리 가족 이야기라 생각해"
 
연기자가 숙명임을 느낀 건 대학생 때라지만 정작 중학생 시절부터 은연중 연기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다녔던 중고등학교가 시부야에 있었는데 캐스팅 제안을 여러 번 받았다. 자연스럽게 배우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됐던 것 같다"며 현리는 "일단 한국어를 잘 배우고 싶은 마음에 교환학생을 선택했고, 그때 연기 선생님을 만나며 연기를 사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처음엔 부모님 반대가 강했다. 근데 제가 연기를 배우거나 화보를 찍는 걸 행복해한다고 느끼셨다더라. 그래서 응원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제가 일본에서 일본 이름 없이 현리라는 이름을 쓴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부모님도 당당하게 활동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지. 스스로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파친코>도 적극 출연하고 싶었다. 원작 소설이 너무 재밌어서 일본어, 영어, 한국어 번역판을 다 샀거든. 재일교포 이야기인데 내 얘기 같다, 우리 가족 이야기 같다고 생각했다. 미국이라는 제3자 시선으로 바라본 게 좋았다. 제가 교포지만 일본에도 수많은 재일교포가 계시기에 어떤 생각을 대표할 수는 없지만 좀 냉정하고 거리를 유지한 채 교포 이야기를 다룬 게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일본에도 재일교포가 주인공인 작품이 많지만, 대부분은 옛날 이미지를 가져오거든. 일본인 친구와 싸운다든지 하는 묘사가 많은데 제 인생에서 그런 경험은 사실 없다. <파친코>가 삼대에 걸친 이야기잖나. 오히려 거기에 교감이 더 가더라."

 
 영화 <우연과 상상>에서 츠구미를 연기한 배우 현리.

영화 <우연과 상상>에서 츠구미를 연기한 배우 현리. ⓒ 이선필


평소 책과 영화가 인생의 즐거움이라며 현리는 "어렸을 때부터 도서관에 있는 책을 거의 다 찾아볼 정도로 책을 좋아한다"며 "일본에서 4년째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는데 거기서 제가 즐긴 책과 영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만큼 책과 영화는 제 인생에서 필수"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더해 여행 또한 본인에게 영감을 주고 연기에 대한 자극을 주는 수단이라고 덧붙였다.
 
OTT 플랫폼 성장으로 현리는 여러 기회의 장을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인 역, 한국인 역이 모두 가능하기에 기회가 두 배라고 생각한다"며 "최근에 여러 대본을 읽고 있는데 다양성, 소수자 이야기가 많더라. 다양한 배경의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다"는 포부를 인터뷰 말미에 밝혔다.
현리 우연과 상상 하마구치 류스케 구라사와 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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