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허리는 반이 접혀있다시피 했다. 족히 구순은 넘어 보였다. 할머니는 당신의 텃밭에서 따왔음직한 푸성귀 등을 가로수 그늘 아래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그 길은 장터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인적이 번다한 곳도 아니어서, 난전을 펼치기에 마땅한 곳은 아니었다.
 
수확한 농작물을 파는 노인들은 종종 목격되지만 이렇게 고령의 할머니는 처음이었다. 새하얗게 센 머리를 소년처럼 짧게 자른 머리, 거의 다빠진 이와 이로 인해 허물어진 입매, 어디에 살이 있을까 싶은 깡마른 몸을 한 할머니는 대체 무슨 기력으로 저 농작물들을 운반해와 난전을 펼친 걸까. 그러고는 날개 접은 새 마냥 둥글게 옹그린 자세로 일체의 미동 없이 손만 움직이며 농작물을 다듬고 계셨다. 노점상 '꼬부랑 할머니'라니.
 
내 엄마와 비교하면 믿을 수 없는 '깡다구'를 가진 할머니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린 난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 '힘들지 않으시냐'는 등 시답잖은 질문을 던졌다가 내 호기심을 가볍게 뭉게시는 바람에 적잖게 당황하고 말았다.

나는 할머니의 노동이 경이로웠다. 내일 돌아가신대도 이상할 것이 없을 고령의 할머니가, '내 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일한다'고 웅변하는 듯한 저 의지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뼛속까지 근면한 탓일까, 아니면 버릴 수 없는 습관이나 규칙 같은 것일까.

인적도 번다하지 않은 길에 난전을 펼칠 배짱은 하루 이틀 벼르다 내본 용기는 아닐 것이다. 평생 저리 바삐 움직여 자식을 먹이고 입혔을 몸의 매커니즘이 늙은 몸이 되어서도 '뒷방 늙은이'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서인지 모른다. 내 호기심은 굴뚝같지만 할머니는 내 관심에 무관심하다. 그저 매일을 같은 장소에서 고구마 줄기나 쪽파, 열무 등을 쉬지 않고 다듬어 파실뿐이다.
 
평생 노동하며 살았다, 떳떳하다
 
생각해 보면 이런 할머니 엄마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시장통에도, 등산로 입구 초라하게 급조된 난전에도, 자신의 몸에 몇 배가 되는 짐을 머리에 이고 집집마다 찾아들던 보따리 상인에 이르기까지. 종일 몸을 움직여 번 돈으로 쌀과 연탄을 사들고 귀가한 엄마는 집에 와서 쉬지도 못하고 급히 밥을 해 아이들을 먹이고 남은 집안일을 마치고서야 고단한 몸을 누였다.
 
다큐멘터리 <왕십리 김종분> 속 김종분의 인생도 그랬다. 집에 쌀이 떨어지자 아이들을 굶게 둘 수 없었던 김종분은 집을 나섰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장사를 시작한 후, 평생 "안 해 본 게 없"는 고되지만 역동적인 인생을 살았다. 시작할 땐 그도 반평생이 넘는 시간을 거리에서 보내게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십 년 넘게 노점으로 생계를 이었고 33년을 왕십리 11번 출구 노점 상인으로 살았다. 그가 33년 한자리를 지킨 상인이라는 사실은, 그 공간의 살아 있는 역사임을 뜻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의 한 장면. ⓒ 인디스토리

 
장사로 잔뼈가 굵은 여장부라도 흐르는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다. 우리 동네 노점 상인 할머니만큼은 아니어도, 누가 봐도 노쇠를 짐작할 만큼 등이 굽었고 하도 써 닳아빠진 관절 때문에 걸음걸이가 삐걱댄다. 불편한 몸으로 시장통에서 장을 봐 온 김종분은 자신의 작은 노점을 빽빽이 채울 물품들을 저울에 달아 내놓느라 분주하다. 작은 노점엔 없을 건 없고 있을 건 있다. 소분해 바구니에 담아놓은 갖은 야채는 종종걸음으로 바삐 귀가하는 엄마들의 저녁 일손을 덜게 다듬어져 있고, 연탄불에 구운 가래떡 그리고 노점에서 직접 쪄 파는 옥수수는 급한 허기를 달래기에 맞춤하다. 뜨겁게 쳐 낸 옥수수를 식히는 채반이 안성맞춤이라 가만히 들여다보니 선풍기 틀이 아닌가. 재활용도 수준급이시네.
 
김종분의 노점을 동심원으로 그 자장에 있는 동료 상인들과의 관계는 경이롭고도 아름답다. 여든을 넘은 30년 대 생 왕십리 노점 상인들은 대단한 노익장을 과시한다. 짱짱한 체력, 데이터베이스화된 촘촘한 기억력, 동료 상인들 사정을 소상히 꿰고 있는 정보력, 무엇보다 이들의 관계의 화룡점정은 서로를 향한 신뢰에 있다.

눈빛만 봐도 속마음을 타진하는 놀라운 촉수는 오래도록 서로의 안위를 보살펴온 사람들 사이에서만 뿌리내릴 수 있는 단단한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아첨하듯 듣기 좋은 말은 알지지 못한다는 듯이, 투박하게 주고받는 대화 속엔 말랑말랑한 감정 따위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건마는, 서로의 매일을 지켜온 이들에겐 분명 단단하고 뜨끈한 무엇이 있었다.
 
이 무엇이, 많은 상인이 실패나 성공으로 들락거렸을 이 공간을 이토록 오랜 시간 박힌 돌로 뿌리내리게 했으리라. 매일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지난한 매일의 버팀목이 되어 준 이들에게 관계의 기득권을 내세우는 가족의 위계는 무의미하다. 징글징글한 남편들을 떠나보내고 애면글면한 새끼들을 출가시키고, 비로소 홀가분한 혼자가 된 늙은 여성들에게 해방감이 묻어나는 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다.
 
삼시 세끼 해 바칠 걱정 없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어도 되는 가부장과 모성으로부터의 해방은, 늙은 여인들에게 마지막 자유의 향연을 제공하고 있었다. 마음 통하는 동무끼리 모여 눈치 보지 않고 왁자한 웃음꽃을 피우거나, 누구의 집이건 선뜻 오가며 묵어가고, 밥하기 싫은 고단한 저녁엔 핑 하니 나가 국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자유가 생긴 것이다. <왕십리 김종분>은 김종분의 우직한 삶을 비춘 오롯한 서사뿐 아니라, 평생 고단한 상인으로 살아온 여성들끼리 축적해 온 우정 또한 의미 있게 조명하고 있다.
 
왕십리 김종분의 딸, 김귀정 열사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의 한 장면. ⓒ 인디스토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구수한 인심으로 왕십리 11번 출구 노점을 지키는 김종분의 얼굴에도 수심이 깊게 드리워지는 순간이 있다. 마음에 묻은 딸이 끄집어내질 때다. 왕십리 11번 출구 노점상인 김종분은, 1991년 민주화 투쟁 중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다.
 
딸이 떠난 지 30년이 지났건만 딸을 잊지 못한다. 자신의 피와 살로 빚은 분신의 흔적을 세월이 흘렀다고 지울 수 있겠는가. 세간의 인심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매몰차지만, 또한 어떻게든 산 사람은 살아지지만, 그렇다고 잊을 수는 없다. 딸의 기일마다 마치 큰 잔치를 치르듯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일상에서 사라지고 없는 딸을 그날만은 마음껏,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생의 한가운데로 불러내어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딸이 없었다면 세상의 부정의를 깨우치지 못했을 것이라는 김종분의 독백은, 폭압적인 정권에 자식들을 잃고 분연히 일어선 수많은 '이소선'들과 함께 부르는 투쟁가다. 그는 딸을 잃고 거리로 나왔다. 평생 있었던 거리는 더 이상 안온한 장소가 될 수 없었다. 자식의 입에 밥이 들어가게 해 준 거리를 걸어 나온 그는, 이제 더 이상 다른 자식의 목숨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목이 터져라 외치며 광장에 서있게 된다. 딸의 죽음으로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과 연대하게 된 김종분은 전국을 떠돌며 폭압적인 정권의 무도함을 알리며 싸웠다.
 
자식의 억울한 죽음으로 민주 투사가 된 어머니들은 놀라운 투쟁을 이어나갔다. 노동 운동하다 구속된 딸의 구명 운동을 하다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투사가 된 정순녀는, "우리 엄마들 힘이 있어야 우리 애들이 덜 당한다"는 믿음으로 기나긴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아들로 인해 민주화 투쟁에 앞장 서게 된 김정숙 역시, '민가협' 투쟁을 통해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비로소, "내 자식 네 자식 구별이 없어"지는 '사회적 모성'을 담지하게 된다. 시위로 전국을 떠돌며 풍찬노숙하게 된 어머니들은 길을 떠나서 비로소 자신의 길을 찾게 되었다. 길에서 각성한 어머니는 "할 말이 생각나고 글씨가 내 눈앞에 보이"는 천지개벽을 통해 더 이상 누구의 어머니도 아닌 그 자신 각성한 인간으로 싸울 수 있었다.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중)
 

민중 앞에 서면 정권의 악랄함을 비판하며 한 마리 호랑이처럼 포효하지만, 홀로 자식을 애도하는 어머니의 얼굴엔 백 년이 지나도 가시지 않을 슬픔이 배어있다. 열사인 딸을 추모하는 사람들 앞에선 의연한 투사지만, 홀로 찾은 딸의 무덤 앞에 어린아이처럼 엎어져 통곡하는 김종분은 단지 자식 잃은 고통으로 애간장이 다 녹아 없어진 엄마일 뿐이다.

이 고통을 누가 대신할 것이며, 이 고통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글을 마무리하는 시간, '유가협' 운동가였던 배은심 여사의 영면 소식이 들린다. 그는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다. 부디 그곳에선 고통 없이 평화로우시기를.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왕십리 김종분> 김종분 김귀정 열사 배은심 여사 노점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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