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이 천신만고 끝에 2020-2021시즌 여자 프로배구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확정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신예 박현주는 안도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 감독과 동료 선수들은 박현주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동료애를 과시했다.

24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여자배구 플레이오프(PO) 3차전에서 흥국생명은 IBK기업은행을 3-0으로 완파하고 시리즈 전적 2승 1패로 챔프전 진출에 성공했다. 흥국생명은 지난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1-3으로 아쉬운 패배를 당하며 위기에 몰린바 있다. 특히 25-25로 팽팽하게 맞서던 4세트에서 박현주가 원포인트 서버로 투입했으나 서브 범실을 저질러 경기 흐름이 그대로 넘어갔고 흥국생명은 패배의 쓴잔을 들이켜야 했다.

박현주는 당시에도 경기가 끝나고 눈물을 쏟았다. 만일 흥국생명이 이대로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면 2차전의 패배가 치명타가 되고, 자연히 그 빌미를 제공한 박현주가 역적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3차전에서 흥국생명 동료들이 팀을 승리로 이끌며 박현주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줬다. '배구여제' 김연경은 이날 오른손 부상으로 붕대를 감은 채 경기를 소화하고도 양 팀 최다인 23점을 올리는 투혼을 과시했다. 이날 김연경은 공격을 37개 시도해 22개를 성공시키는 동안 공격 범실은 하나에 불과했고, 단 한번도 상대 블로킹에 막하지 않았다. 공격 효율은 무려.568에 이르렀다. 김연경의 투혼에 자극받은 김미연, 김다솔, 이주아, 브루나 등 주전 멤버들의 집중력도 함께 살아나며 흥국생명은 2차전과 전혀 다른 팀이 됐다.

3차전을 내내 벤치에서 지켜봐야만 했던 박현주는 흥국생명의 승리가 확정되자 코트로 달려 나가 선수들과 기쁨을 나눴다. 마음고생이 컸을 어린 선수의 눈물을 돌아가면서 다독이는 흥국생명 선수단의 모습은 짜릿한 승리 이상의 감동을 선사했다. 흥국생명이 진정한 '원팀'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다.

흥국생명은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김연경과 국가대표 세터 이다영을 동시에 영입하며 절대 1강으로 평가 받을 만큼 강력한 우승후보로 급부상했다. '어우흥(어차피 우승은 흥국생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흥국생명의 전력은 막강해 보였다.

하지만 시즌 중반에 갑작스럽게 터진 '학교폭력 사태' 이후 흥국생명은 직격탄을 맞았다. 이다영과 이재영 쌍둥이 자매가 '학폭'으로 사실상 전력에서 제외됐다. 선수관리와 팀 기강을 다잡는 데 실패한 흥국생명 구단의 책임도 여론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선수단의 전력과 사기는 땅바닥에 떨어졌다.

흥국생명은 학폭 사태 이후 5-6라운드 마지막 10경기에서 2승 8패의 극심한 부진에 그치며 다잡은 듯하던 정규리그 1위를 라이벌 GS칼텍스에 내주고 2위로 밀려났다. 모두가 흥구생의 우승을 당연하게 여겼던 팬들의 예상을 뒤집은 반전이었다. 설상가상 간판스타 김연경은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올 시즌을 끝으로 다시 흥국생명을 떠나 해외무대로 떠날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만일 흥국생명이 플레이오프에서 기업은행에까지 무너지며 챔프전 진출 티켓마저 놓쳤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새드엔딩이 될 뻔했다.

하지만 흥국생명은 결국 챔프전 진출에 성공하며 우승후보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었던 김연경의 고별전도 챔프전으로 연기됐다. 모두가 우러러보던 '절대강자'의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극복하고 일어서는 '도전자'의 입장이 된 흥국생명. 

팬들이 흥국생명에게 진정으로 기대했던 것도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어우흥' 시절의 흥국생명은 승리를 따내기는 더 쉬웠을지 몰라도 그 안에 감동은 부족했다. 프로스포츠에서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강자의 오만함이나 이기심으로 점철된 결과보다는 팀원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하여 합심하며 위기를 극복해 내는 드라마틱한 과정에서 나온다.

김연경은 핵심 선수들의 이탈, 어수선한 팀분위기, 본인의 부상이라는 삼중고 속에서도 간판 선수다운 책임감으로 끝까지 팀원들을 이끌며 진정한 스타플레이어의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를 행동으로 증명했다. 이다영-재영 자매의 이탈로 갑작스럽게 출전시간이 늘어난 백업멤버들이나 젊은 선수들은 부담감에 실수를 연발하는 아쉬운 장면도 있었지만, 주눅들거나 동료를 탓하보다는 서로를 격려하며 위기를 함께 헤쳐나가는 끈끈한 모습을 보여줬다. 

흥국생명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한 안갯속에 있다. 당장 챔프전에서는 난적 GS칼텍스가 기다리고 있다. 올 시즌이 끝나고 김연경이 팀에 잔류할지 불투명하다. 하지만 유난히 길고 험난했던 이번 시즌에 겪은 경험들이 흥국생명의 젊은 선수들과 팀워크가 발전하는 데 좋은 자양분이 될 수 있다면, 우승 여부를 떠나서라도 충분히 가치 있었던 시간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흥국생명은 지금 진정한 팀으로 거듭나는 방법을 다시 배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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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박현주 흥국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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