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예능 방송인으로 더 친숙한 서장훈은 젊은 시절에는 역대 한국농구 최고의 선수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프로에서도 통산 최다득점(1만3231점)-리바운드(5235개) 기록을 보유했을 만큼 레전드였지만, 역시 서장훈의 존재감이 가장 압도적이었던 시기는 단연 '농구대잔치'시절이었다. 프로 출범 이전 아직 외국인 선수도 없던 시절, 서장훈은 불과 스무살의 나이에 그야말로 '대마왕'의 포스를 뿜어내며 성인농구를 평정했다.

당시에는 2미터 이상의 장신들이 지금보다 드물었고, 190대 초반에 불과한 선수들이 빅맨을 보는 경우가 흔했던 시기였다. 207cm의 국내 최장신에 준수한 운동능력과 정확한 중장거리슛까지 겸비한 서장훈은 당시 국내 선수들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던 사기적인 존재였다.

연세대는 서장훈이 입학한 첫해, 국내 최강팀이던 기아자동차의 6연패를 저지하고 대학팀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농구대잔치를 제패하는 위업을 달성했으며, 서장훈은 당연히 MVP에 올랐다. '군계일학'이라는 표현처럼, 단지 한 명의 선수가 아예 리그 판도 자체를 완전히 바꿀 정도의 파괴력을 보여준 사례는 이후로도 한국농구에서 찾기 힘들다.

KB스타즈의 '국보센터' 박지수

2020년 여자프로농구 KB스타즈의 '국보센터' 박지수를 보고 있노라면, 1994년의 서장훈을 떠올리게 한다. 올시즌 박지수는 WKBL의 생태계 파괴자로 떠올랐다. 5경기를 치른 현재 박지수는 경기당 평균 27.8득점에 리바운드 15.8개, 블록슛 3.4개로 각 부문에서 모두 1위를 달리고 있다. 개막 이후 한 시즌 5경기 연속으로 20-10(득점-리바운드)을 달성한 것은 국내 선수로는 최초다. 정은순-정선민 등 역대 한국여자농구를 풍미한 레전드들도 이루지 못한 기록이다. 말 그대로 컴퓨터 게임에서나 나올 것같은 원맨쇼를 펼치며 WKBL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여자프로농구는 코로나19 사태와 국내 빅맨 보호 등을 이유로 외국인 선수 제도를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국내에서 독보적인 높이와 기량을 자랑하는 박지수가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박지수는 196cm으로 국내 여자농구 최장신이다. 두 번째로 신장이 큰 선수인 이주영(189cm. 신한은행)보다도 무려 7cm나 더 크다. 외국인 선수도 없는 지금, 가뜩이나 센터 기근에 시달리며 185cm 이상의 빅맨을 찾기도 힘든 현재의 여자농구 인프라에서 박지수를 일대일로 막아낼 수 있는 선수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박지수와 매치업을 이루는 상대 빅맨들은 신장에서 10~20cm 이상 차이가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박지수는 단지 키만 큰 선수가 아니다. 신체조건을 활용한 포스트플레이에도 능하지만, 2대2플레이나 점프슛 능력도 구력이 쌓일수록 향상되고 있다. 어시스트도 4.2개로 전체 7위에 오른 것에서 보듯, 자신에게 더블팀이 몰렸을 때 오픈된 동료를 찾아내는 시야와 패스능력도 수준급이다. 상대팀들이 맨투맨과 지역방어, 트랩 등 다양한 수비를 시도하며 박지수를 봉쇄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다.

박지수라고 부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KB스타즈는 절대강자라는 예상이 무색하게 개막 직후 아산 우리은행과 부산 BNK 썸에게 뜻밖의 2연패를 당하며 다소 불안하게 출발했다. 박지수가 20점-15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하며 제몫을 다했음에도 동료들의 지원 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상대팀들은 김정은(180cm)과 김소니아(176cm, 이상 우리은행), 진안(185cm)과 김진영(180cm, 이상 BNK) 같이 포워드형 선수들을 골밑에 배치하여 박지수에게 줄 점수는 주더라도 지속적인 몸싸움과 활동량으로 박지수의 체력을 소모시키는 전략을 쓴 것이 주효했다.

하지만 변칙적인 농구가 한두번은 통할 수 있어도 반복해서 성공하기는 어렵다. 스몰라인업은 상대팀으로서도 리바운드 열세와 체력적 부담이라는 약점을 감수해야한다. 초반 상대의 집중견제에 부담을 느끼는듯 하던 박지수가 서서히 적응을 마치고 자신감을 되찾으면서 과감한 골밑 공략이 늘었다.

이제는 박지수가 수비수를 달고서도 어렵지 않게 마무리에 성공하는 모습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오히려 박지수에게 수비가 몰리다보면 강아정·심성영 같은 득점력있는 선수들에게 노마크 찬스가 나는 확률도 높아진다. KB는 2연패이후 3연승을 내달리며 신한-우리은행과 1라운드 공동 선두로 올라서는데 성공했다.

부상 위험이라는 측면에서 봤을때 다행히도 박지수는 서장훈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 1990년대 같은 과격한 몸싸움이나 파울에 지나치게 관대한 하드콜(심판판정)은 2020년대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특히 올시즌의 여자농구에는 '핸드체킹'룰이 강화되며 박지수 같은 공격수들에게 더욱 유리해졌다. 노골적으로 손을 쓰거나 몸싸움시 과도한 신체접촉은 바로 파울이 불린다.

물론 박지수의 지나친 독주가 WKBL의 전력 균형이나 선수 개인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현상인지는 좀더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1라운드부터 박지수를 막을 수 있는 팀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어차피 우승은 KB'라는 이야기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이는 자칫 리그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는 부분이다.

박지수는 국가대표나 WNBA에서는 높이와 기량에서 자신 못지않은 외국의 장신선수들을 상대해야 한다. 국내무대에서 자신보다 작은 선수들을 상대로 쉽게 플레이하는데 익숙해지다 보면 박지수의 기량 발전에서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

지나친 혹사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박지수는 5경기에서 벌써 177분을 소화했다. 평균으로 따지면 35분 29초에 이른다. 2017-18시즌(35분 9초)을 뛰어넘는 최다출전시간 기록이다. 그때보다 박지수가 공수에 걸쳐 짊어진 비중이나 상대의 집중견제 빈도가 더 높아졌다는 것을 고려하면 체력적 부담은 더 크다.

앞으로도 박지수를 제어하는 것이 모든 팀들이 수비전략 1순위가 될 수밖에 없다고 했을때 박지수가 부상이나 슬럼프없이 시즌 내내 꾸준한 활약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벤치의 적절한 관리도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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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 서장훈 WK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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